늦가을, 축제 판을 제대로 벌여놨네

깊어만 가는 늦가을, 작은 축제 하나

by 무상행




이제는 절기를 따지지 않아도 늦가을이다.

옆을 보니

가을이 멀리, 더 깊은 산속으로 가고 있다.


마을 뒷산, 태봉산에 올라 늦가을 산길을 걸었다.

산길 폭은 두 사람이 나란히 걸으면 한 자(30cm) 정도 여유가 있다.

완만한 산등성이를 조금 지나면 평편한 길이 이어진다.

산등성이, 한적한 평지.

이곳에서 늦가을이 본격적으로 판 벌려놓고 축제를 하며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

축제다. 늦가을은 저잣거리처럼 사방 천지에 단풍색 풀어내고 있고, 바람이 불 때마다 형형색색 낙엽이 후드득 소리 내며 우수수 떨어진다. 산국은 알싸한 향기로 모여 피고, 구석에서는 마른 풀꽃 할미들이 꼿꼿이 허리 펴려고 애쓴다. 나무 그늘에서는 풀벌레가 노래한다. 봉분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곳에서는 콩중이가 콩콩 폴짝 뛰면서 재주를 부리며 축제의 흥을 돋운다. 힘 빠진 산귀뚜라미도 나와 마지못해 폴짝 튄다.

늦가을이 이제는 바쁜 것이 없는 산에 사는 것들, 산짐승, 산새, 벌레, 나는 것, 기어 다니는 것들의 겨우살이 준비를 위해 나름 열심히 준비한 축제이다. 즐겁고 흥겨운, 산에 사는 것들만의 축제이다. 올 수 있거나 갈 수 있으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나도 손님인 것처럼 그 축제판의 저잣거리를 쉬엄쉬엄 거닐었다. 걸음걸음에 잘 마른, 울긋불긋 낙엽이 바스락바스락 소리를 내며 부서진다.


가을햇살 아래, 갈참나무는 길 가장자리에 예쁜 모자를 쓴 도토리를 소복이 펼쳐놓았다. 산수유는 빨간 열매로 한껏 부피를 부풀리며, 지나가는 손님을 위해 빨간 열매 몇 개를 단풍 든 잎과 함께 지 발아래 흩트려놓았다. 산수유는 나무가 가을 단풍이 드는 순서를 잘 보여주는 나무라고 생각한다. 산수유 잎은 노랗게 물들고, 붉은 단풍물이 가지 끝, 잎 끝에서 내려오는 것을 그대로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멀리 길가 모과나무도 벌레 먹은 노란 모과를 몇 개 떨어뜨려 놓았다. 밤나무도 발아래 발간 낙엽 위에다 토실토실한 알밤을 반질반질하게 까 놓았다. 망개나무는 산새가 열매 훔쳐가는 것을 막기 위해 옹글옹글 뭉친 빨간 열매 사이사이에 긴 바늘을 숨겨놓았다. 산등성이 쪽에 노랗게 마른 산도라지가 꽃꽂이 서서 자기의 위치를 가르쳐 준다. 여물어진 풀씨들도 손님을 기다란다. 곤줄박이 한 마리가 어떤 맛난 것이 있는지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살피더니, 친구들을 부르러 날아간다. 바닥을 자세히 살펴보니 많은 기어 다니는 것들이 저잣거리를 분주하게 오간다. 이 늦가을, 야산에도 축제는 축제구나. 저기 쫑알쫑알 대는 박새들은 언제 왔었지.

산에서 열리는 축제의 단골손님인 벌 나비는 이곳저곳을 한없이 느릿느릿 날갯짓하며 돌아다니다가 머물고 또 날고 한다. 흥정하는 것도 성의가 없다. 그래, 이 늦가을에 너희는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마른풀의 여문 씨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래도 들풀은 초조하지 않다. 분명, 바람에 날릴 수도 있고, 운 좋으면 지나가는 짐승의 털에 붙을 수도 있으니까.



한참을 저잣거리를 돌며 구경하다가 햇살 잘 드는 곳에 앉는다. 저 멀리 지나 온 산자락에 산감나무 한그루 있었다. 빨갛게 익어가는 산감을 까마귀들이 쪼아 먹고 있었다. 산감나무 아래를 지나며 주워온 산감 두 개를 꺼낸다. 가장 잘 익어 달콤한 부분은 이미 산새가 쪼아 맛본 자국이 있다. 이제는 내가 맛본다. 달다. 약간 떫은 기도 있는데 참 달다.

산감을 맛있게 먹으며 주위를 둘러본다. 아, 근처 바위 아래 습기 찬 곳에서는 지네가 아직도 신발을 신고 있구나. 축제가 벌어진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신발을 신고 있니. 발이 많으니 신발 신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러다가 축제에 늦을라, 어서 서둘러라.


근처에 잠자리 한 마리가 저잣거리를 저공비행하다가 쉬려는 것인지 마른 나뭇가지를 땅에 꽂고 있다. 잠자리에게 무엇을 사야 하는지는 하찮은 고민이다. 그 자세 그대로 묵상에 든다. 너는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구나. 나는 것, 쉬는 것 모두가 정진하는 자세구나.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스레 일어난다. 축제에 도움 되지 않는 사람 손님이 다시 저잣거리로 나선다.

산이 겹치는 보랏빛 계곡에서는 까마귀가 날고 있다. 뾰족한 울음소리가 묵직이 계곡의 가을에 떨어진다.


흔한 마을 뒷산이지만 이름도 있고, 낮은 산 높이이지만 그래도 산 정상이라고 시원한 골바람이 불어온다. 굴참나무 숲 바람 속에 파도소리 들리다. 한편에 모여있는 억새는 바람이 불 때마다 서걱대며 하얀 보프레기를 바람에 실어 보낸다. 눈은 보는 만큼 보고, 귀는 열려있는 만큼 듣는다. 곰삭고 있는 열매 향기가 바람 타고 하늘로 퍼진다. 떨어진다.


발끝 아래를 보니 알록달록한 꽃뱀이 겨울 잠자리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구불구불 지나간다.


아무에게도 축제를 알리지 않아도 산에 사는 걷는 것, 나는 것, 기는 것은 때가 되면 이렇게 찾아온다. 가을볕이 좋아서 구경삼아 오든, 겨울을 나기 위해 준비하려고 오든, 오래 못 본 다른 친구를 보러 오든 모든 것은 자유다. 눈에 보여도 보이지 않아도, 멀리 혹은 발아래, 모두가 분주한 축제다.


산자락을 내려가 마을 어귀, 당산나무인 느티나무 아래에서 쉬었다. 이 당산나무는 마을이 생길 때부터 이곳에 자리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주 나이가 많이 든 이 느티나무도 노란 갈색으로 물들었다. 잎 끝은 푸석하게 말라간다. 내 눈에는 당산나무가 노랗게 단풍 든 것이 아니라 황달끼가 비치는 것 같다. 건강하세요.




늦가을이다.

세상이 가을에 익어간다.

그래서, 홀로 감당할 수 없어서, 가을은, 특히 늦가을은 축제라는 판을 벌여 놓는 것이다.

세상 어느 구석, 고요한 곳에서는 이런 축제가 무수히 벌어지고 있다. 우리가 모를 뿐이다.

그곳의 축제도 보고 싶다.


아마, 축제가 끝나면 늦가을도 나도 한 사나흘은 가을 젖몸살 앓듯 드러누워야 할 것 같다.

가을은 꼭 쓸쓸함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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