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들어서도 가을의 기억을 뒤적인다.

계절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순서대로 반복된다

by 무상행

촉감, 소리, 빛깔이 달라졌다. 날짜를 헤아리지 않아도 이제는 겨울에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무도 산도 하늘도 웬만큼 비워냈다. 바람도 우우 소리를 내며 거침없이 빈 들판을 내달린다.

겨울 아침햇살이 흐르듯 번진다. 긴 밤 사이 차가워진 그늘을 천천히 밀어내고 있다.

겨울잠에 들지 않아도 긴 꿈을 꾸기에 좋은 계절, 겨울이다.



지난가을 동안 일어난 일을 겨울 들어서, 기하학적 혹은 부호화적으로 정리해 본다


산도

나무도

무른 둔각에서 예각으로


비는 눈으로

직선에서 사선으로


바람은

곡선에서 꼬임으로


머물던 사람도, 떠난 사람도

실선에서 점선으로

풀들은

3차원에서 2차원으로

그대로 말라 박재되다. 그리나 봄의 환생을 꿈꾼다


그리고


들과 논은 점점 부호화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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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에서 12월 들 무렵.

그날, 새벽에 잠 깨어 집에서 나왔다.


밖에서는 올해 가을이 마지막이란 듯이 요란하게 천둥 번개가 치며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장기 일기예보를 보니 12월 초에 백설표 눈이 그려져 있다. 올해 마지막 비인가. 마지막치곤 새벽에 요란하다.

우산을 쓰고 걷다가 아파트 난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은행나무와 단풍나무는 겨울을 준비하려고 잎을 거의 떨어뜨렸는데, 작은 단풍나무 하나는 잎이 무성한 편이다. 단풍나무와 찻길 옆 교차로 신호등은 비에 젖어도 그대로 서 있다. 천둥이 우르릉 소리 내고, 5초 후에 번개가 번쩍인다. 1.7 킬로 미터 밖에서 번개가 내린 것이다. (340 m/s x 5 s= 1.7 km. 잊히지 않는 초등 과학)

올해 마지막 빗소리,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차갑고 습기 찬 재즈나 파두(포르투갈 전통 노래)로 들린다.


무엇인가를 생각하기에는 비가 너무 많이 온다.

멍하니 쏟아지는 비, 길 건너편의 흔들림과 신호 바뀜을 쳐다보다가 핸드폰을 꺼냈다.


2025년, 가을 마지막 비_ 겨울 첫눈


12월 초. 저녁에 집을 나서니 눈발이 날린다. 어쨌든 올 겨울 들어 첫눈이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첫눈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모여 놀다가 약속 하나 했다. 첫눈이 오면 백화점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12월 어느 날 저녁 무렵, 눈이 조금씩 내리며 바람에 휘날렸다. 첫눈이 내린다고 해야 할지... 애매했다. 집 근처에서 주황색 공중전화로 내가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던 친구에게 전화했다. 친구 어머님이 전화를 받으시고, "기석이 나갔다"라고 하셨다. 친구는 부재중이었다. 무작정 시내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시내 중심가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가게마다 크리스마스 캐럴과 장식으로 가득 찼다. 길거리에는 노점 리어카에서 흘러나오는 최신 가요와 캐럴이 조금의 빈 틈이라도 있으면 스며들어 꽉 채웠다. 그때는 이런 길을 걷는 것이 세상이 축복으로 넘치는 것 같아서 괜히 기분이 좋았다. 멀리 백화점이 보였다. 발걸음은 인파에 휩쓸려 천천히 밀리고, 마음만 조급하여 뛰었다. 백화점 입구, 산타 인형 옆에 부재중이었던 친구의 모습이 보였다. 친구도 나를 발견하고는 씩 웃었다. 혹시 다른 친구들이 올 지 몰라 들뜬 거리를 구경하며 한 시간을 서서 기다렸다. 주머니에 손 넣고 발을 동동 굴려도 춥지 않았다. 아무도 오질 않아 분식집에 가서 우동을 사 먹었다. 애매했던 첫눈은 그친 지 오래되었다.


수 십 년이 흐른 지금,

친구들 중 누구는 첫눈 올 때의 약속을 기억할까? 그때처럼 이런 눈은 눈도 아니다고 할까?

왠지 그때의 부재중 친구는 이번에도 백화점 앞에서 기다릴 것 같다.


한참을 서서 애매하게 내리는 첫눈을 쳐다보다가 핸드폰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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