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시... 첫 문장 I

우연히, 알려지고 기억에 남는 처음과 끝 문장 자료들을 보다가...

by 무상행


다 기억할 수 없어도, 다 읽지 않았어도 좋다.

널리 알려진 글들, 소설이나 시의 첫 문장만을 보자. 그들은 이렇게 시작하였다.

그리고, 첫 문장을 사용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글도 만들어 보자. 길어도 좋고 짧아도 좋다. 소설, 에세이, 시, 메모... 무엇이든 상관없다. 나름대로 감정을 덧붙이는 것도 스스로의 작은 완성이다.


오늘, 나도 도서관에 가서 천천히 그런 일을 해 보려고 나선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지만.

눈이 내린다.

차에 타고 시동을 걸었다.




첫 문장 I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멀리 보이는 배들에는 모든 사람들의 소원이 실려 있다.

조라 닐 허스턴,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다>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홀로 돛단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는 노인이었다. 팔십하고도 나흘이 지나도록 그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알베르 카뮈, <이방인>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레프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무지개 너머에서 전화가 왔다.”

윤후명, <이별의 노래>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 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 리. 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롤리타>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레고르는 잠자는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프란츠 카프카, <변신>


4월의 맑은 날이었고, 시계는 13시를 치고 있었다.

조지 오웰, <1984>


대지의 황금빛 저녁놀이 늦도록 불타올랐다. 양치기 산티아고가 양 떼를 데리고 버려진 낡은 교회 앞에 다다랐을 때는 날이 저물고 있었다.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왔다. 때로 촛불이 꺼지자마자 눈이 너무 빨리 감겨 '잠이 드는구나.'라고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해 여름도 다 지나갈 무렵 우리는 강과 들판을 사이에 두고 산들이 바라보이는 어느 마을의 민가에 머무르고 있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무기여 잘 있거라>


지난밤 다시 맨덜리로 가는 꿈을 꾸었다.

대프니 듀 모리에, <레베카>

오클라호마 시골의 붉은색 땅과 회색 땅에 마지막 비가 부드럽게 내렸다. 이미 상처 입은 땅이 빗줄기에 다시 베이지 않을 만큼.

존 스타인벡, <분노의 포도>

드리나강의 물길은 대부분 산속 좁은 협곡을 흘러가거나 절벽의 둑을 안은 깊은 벽지를 뚫고 흐른다.

이보 안드리치, <드리나강의 다리>


그래, 사실이다. 나는 정신 병원에 수용된 환자다. 나의 간호사는 거의 한눈도 팔지 않고 감시 구멍으로 나를 지켜본다. 하지만 간호사의 눈은 갈색이기 때문에 푸른 눈의 나를 들여다볼 수 없었다.

귄터 그라스, <양철북>


옛날에, 아주 살기 좋던 시절, 음매하고 우는 암소 한 마리가 길을 걸어오고 있었단다. 길을 걸어오던 이 음매 암소는 아기 턱쿠라는 이름을 가진 예쁜 사내아이를 만났단다.

제임스 조이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오전 5시, 언제나처럼 기상 신호가 울렸다. 본부 막사 앞에 매달아 놓은 레일 토막을 망치로 치는 소리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그 일은 잘못 걸려온 전화로 시작되었다. 한밤중에 전화벨이 세 번 울리고 나서 엉뚱한 사람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폴 오스터, <유리의 도시>

수년 후, 총살형을 앞둔 어느 날, 아우렐리아 부엔디아 대령은 아버지를 따라 얼음을 보러 갔던 먼 옛날의 오후를 떠올렸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 년의 고독>


항구의 하늘은 방송이 끝난 텔레비전 색이었다.

월리엄 깁슨, <뉴로맨서, Neuromancer>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김훈, <칼의 노래>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

이승우, <사랑의 생애>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최인훈, <광장>


雨ニモマケズ
風ニモマケズ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미야자와 켄지, <雨ニモマケズ 비에도 지지 않고>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강신재, <젊은 느티나무>


초록빛으로 가득한 들녘 끝은 아슴하게 멀었다. 그 가이없이 넓은 들의 끝과 끝은 눈길이 닿지 않아 마치도 하늘이 그대로 내려앉은 듯싶었다.

조정래, <아리랑>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박용래, <저녁 눈>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김춘수, <꽃>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몰라도 된다.

나태주, <내가 너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소설이나 시를 다 읽지 않아도 좋다. 첫 문장 만으로도 좋다. 세상의 수많은 문장들은 나에게 들어와 또 다른 나만의 글을 만들어 간다. 그 문장에 대한 감성적 혹은 이성적 이해만 남아도 괜찮다. 느낌만 남아도 가슴을 한 번 울린 것이다. 자기만의 작은 완성도 만들어 보자. 천천히...



위의 첫 문장 들을, 조금은 어색하지만, 연결해 본다. 이런 것도 흥미롭다.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왔다. 때로 촛불이 꺼지자마자 눈이 너무 빨리 감겨 '잠이 드는구나.'라고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레고르 잠자는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 사실이다. 나는 정신 병원에 수용된 환자다. 나의 간호사는 거의 한눈도 팔지 않고 감시 구멍으로 나를 지켜본다. 하지만 간호사의 눈은 갈색이기 때문에 푸른 눈의 나를 들여다볼 수 없었다.

그 일은 잘못 걸려 온 전화로 시작되었다. 한밤중에 전화벨이 세 번 울리고 나서 엉뚱한 사람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무지개 너머에서 전화가 왔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지난밤 다시 맨덜리로 가는 꿈을 꾸었다.

옛날에, 아주 살기 좋던 시절, 음매하고 우는 암소 한 마리가 길을 걸어오고 있었단다. 길을 걸어오던 이 음매 암소는 아기 턱쿠라는 이름을 가진 예쁜 사내아이를 만났단다. 초록빛으로 가득한 들녘 끝은 아슴하게 멀었다. 그 가이없이 넓은 들의 끝과 끝은 눈길이 닿지 않아 마치도 하늘이 그대로 내려앉은 듯싶었다. 드리나강의 물길은 대부분 산속 좁은 협곡을 흘러가거나 절벽의 둑을 안은 깊은 벽지를 뚫고 흐른다. 4월의 맑은 날이었고, 시계는 13시를 치고 있었다.


그해 여름도 다 지나갈 무렵 우리는 강과 들판을 사이에 두고 산들이 바라보이는 어느 마을의 민가에 머무르고 있었다. 오클라호마 시골의 붉은색 땅과 회색 땅에 마지막 비가 부드럽게 내렸다. 이미 상처 입은 땅이 빗줄기에 다시 베이지 않을 만큼. 오전 5시, 언제나처럼 기상 신호가 울렸다. 본부 막사 앞에 매달아 놓은 레일 토막을 망치로 치는 소리다.

수년 후, 총살형을 앞둔 어느 날, 아우렐리아 부엔디아 대령은 아버지를 따라 얼음을 보러 갔던 먼 옛날의 오후를 떠올렸다.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홀로 돛단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는 노인이었다. 팔십하고도 나흘이 지나도록 그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멀리 보이는 배들에는 모든 사람들의 소원이 실려 있다. 항구의 하늘은 방송이 끝난 텔레비전 색이었다.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 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 리. 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너는 몰라도 된다.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비에도 지지 않고 雨ニモマケズ

風ニモマケズ 바람에도 지지 않고


대지의 황금빛 저녁놀이 늦도록 불타올랐다. 양치기 산티아고가 양 떼를 데리고 버려진 낡은 교회 앞에 다다랐을 때는 날이 저물고 있었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자료는 네이버, 나무위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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