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쓰레기인가보다
가장 어렵고, 힘든 시기를 보내는 그 사람 옆에 있어주기로 결정했을 때 그 모든 힘듦과 우울감이 그대로 나에게 올 거라는 인지를 하지 못했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의 옆에 있기로 결정하고 나서부터 최대한 그를 웃게 만들려고 정말 많은 노력을 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점점 자신만의 세상으로 들어가고, 깊은 동굴에 들어가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점점 나는 지쳤고, 내가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처음으로 내가 좀 나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 병원을 가자고 하면 자기를 정신병자 취급하는 것 같아서 발끈했고, 같이 밖에서 데이트하자고 하면 돈이 없다고 하고.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직장 사람들과는 계속해서 저녁 약속을 잡고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게 되면서 나는 헤어져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결이 아주 잘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만나보니 생각보다 많이 따듯하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과거는 생각보다 많이 복잡했고, 잘 정리되지 못한 과거의 연인도 존재했다. 그 증거들을 본 나는 그 순간부터 마음을 주기보다는 하나부터 열까지 그의 모습이 못마땅해 보이고 하찮아 보였다. 아마도 내가 사람한테 하찮다고 표현하는 것조차도 이미 내가 나쁜 사람일지도. 나이는 찼는데 하고 있는 일들을 1년도 채 채우기도 너무 버거워했고, 돈을 모으기보다는 빛이 하루하루 더 늘어가더니 결국 1억이 넘는 빚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입을 거, 먹을 거, 쓸 거는 다 해야 한다면서 아무렇지 않게 하루에 몇만 원씩 쓰는 그의 씀씀이에 점점 어이가 없어졌다. 과거의 상처는 또 대단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결혼하신 부모님, 그리고 아버지는 계속 시댁에 돈을 빌려주고 어머니는 그거에 갈등을 겪고, 그 사이에서 자식들은 불편함을 표현하기보다 아예 침묵을 선택하고 눈치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어릴때 부모님과 떨어져 멀리 미국으로 보내지고, 체구도 작고 동양인이였으니 거기서 받은 인종차별과 폭력에 또 다른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다.
그게 이제 한계가 온 타이밍이었을까, 수입에 비해 지출이 2배 3배가 되고, 하는 일에는 더 이상 흥미를 못 느끼고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성인이 된 지금의 모습을 비난하는 모습을 보면서 점점 그가 아픈 사람으로 보였다. 그리고 아픈 사람 옆에 있으면 같이 병들어가는걸 나는 몰랐다. 그 사람이 어두워질 수록 우리의 사이도 점점 어두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조심스레 얘기를 꺼내고 대화를 시작하면 결국 듣는 얘기는 " 나 힘들다고. 결국 너는 지금 니 생각만 하는거잖아? 너 참 이기적이다" 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둘에 대한 얘기를 하면, 본인도 힘든데 어떻게 하라는 반응은 더 이상 할말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내가 판단했던 그의 모습은, 분노조절장애(Impulse-Control Difficulty) 경향이었다.
감정이 올라오면 바로 폭발하거나 언어적 공격으로 바뀌는 모습. 감정을 인지하거나 조절하는 능력이 미숙해서, ‘슬픔’이 ‘분노’로 변환되는 전형적인 패턴이다. 자기 안의 약함을 감당 못할 때 화로 덮는 사람들한테 자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우울 및 불안 혼재형(Depressive–Anxious Pattern)
“20년을 잘못 살아온 것 같다”,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극도의 무가치감 + 불안으로 인한 과민 반응을 하고 겉으로는 “짜증·비난”으로 나타났다. 실제로는 자기 비하가 너무 강해서, 누군가가 자신을 떠나거나 무시할까 봐 불안을 공격으로 바꾸는 형태였다.
나는 비로소 한걸음 더 떨어진 상태에서 그 사람을 보았을 때 이건 ‘병의 영역’이지, ‘관계의 탓’이 아니다 나는걸 뒤늦게 알았다. 즉, 내가 아무리 잘해도 전문적 치료 없이는 근본적 변화가 어렵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내 목표는 “그 사람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호하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건강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여자들의 망할 모성애 때문인 건지, 내가 미련한 건지 아니면 욕심이 많은 건지.. 그가 괜찮아질 거라고, 사람 힘들 때 버리는 거 아니라고 스스로 다독이면서 버텼지만 결국 나도 그만큼 그릇이 크고 단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느꼈다. 망가져버리는 그 사람의 모습이 더 이상 빛나지도 않고, 더 이상 위로해주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는 더 이상 왜 그 돈을 갚지 못했는지, 부모님은 왜 그렇게 나약한 아들을 도와주지 못하는지, 매일 전화를 하면 '애기~'라고 부르는 누나는 왜 그렇게 동생을 더 위로해 주되 현실적인 해결책과 조언을 해주지 못했는지 이제는 모든게 엉망징창 같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