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주가리
올여름 우리 집은 에어컨 없이도 잘 견디어냈다. 미련하다고 하겠지만 더위를 별로 타지 않아 에어컨이 고장 났음에도 하루 이틀 미루다 보니 여름이 다 지나갔다. 우리 집 토리가 현관바닥에 가서 잠을 자는 고초를 겪었지만 남편은 선풍기로, 난 그냥 견디다 보니 여름이 지나갔나 보다. 난 냉혈한인지 그리 더위를 타지 않는 편이다. 손님이 올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여름 손님은 없었다. 가능하면 밖에서 만나는 전략을 썼다. 그렇게 가기 싫다고 하던 여름도 세월 앞에서는 장사 없다는 말 따라 가나보다. 요즘은 얼굴에 스치는 찬기가 스민 바람이 얼마나 상큼한지 모른다.
가을바람이 말라가는 가슴 안에 풍선처럼 가득 들어와 들로 산으로 쫓아가게 만든다. 요즘은 맨발 걷기를 매일 해서인지 걸음걸이가 아주 빨라졌다. 아마도 내가 산책하는 곳에선 내 걸음을 따라올 사람이 없을 듯하다. 어쩌든 난 걸음이 빠르다. 성질도 급하고. 뭐든지 빨리 하는 편이다. 딱 하나 느린 건 꽃 보러 다닐 때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누가 노래하지만 난 사람보다는 꽃이 훨씬 아름답다고 끝까지 우긴다. 외모도 예쁘지만 마음속까지 꽃이 훨씬 아름다울 것 같다. 자세히 보면 더 아름다운 게 식물이다.
요즘 울타리에 계요등 꽃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지만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게 박주가리꽃이다. 둘이 경쟁하듯 한창 멋을 부린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하고 묻는 백설공주에 나오는 새엄마같이 주문을 외우고 있지 않을까 생각할때도 있다.
박주가리 꽃들도 반짝반짝 거리며 줄기를 내며 덩굴을 뻗더니 지금은 열매를 매단 애들도 보인다. 봄에 땅속줄기가 뻗어 심장 모양의 잎이 두툼하고 반질거린 모습으로 마주난다. 많이 날려 퍼진 씨앗만큼 울타리나 빈터사이에 붙잡을 것이 있는 곳 어디에나 자라난다.
포송포송한 털을 달고 울타리에 매달리기도 하고, 울타리 사이에 숨어서 핀 연분홍 꽃들을 어떻게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커다란 잎 사이로 연한 자주색 꽃이 별처럼 피어나면 지나가는 시선들이 온통 집중해진다. 꽃잎이 5갈래로 갈라진 통꽃이 수술 5개와 암술 1개와 함께 안쪽에 흰색 털을 가득 담고 있다. 이런 넝쿨로 아무 곳에서나 살아가기가 너무 아까운 아름다운 꽃이다. 사람처럼 꽃들도 어디 귀천이 있겠냐마는 이처럼 예쁜 꽃이 제대로 대우도 못 받고 울타리 속을 비집고 피어나는 것이 어쩐지 안타까운 것은 내가 너무 편협한가?
박주가리가 아이들에게 인기인 이유는 열매에 있다. 별 같은 아름다운 꽃이 지면 그 자리에 파란 열매가 나오기 시작한다. 다른 꽃들은 열매를 맺기 시작하면 잎들이 말라가지만 두툼한 잎을 자랑하는 박주가리는 잎과 함께 여주를 닮은 듯 한 열매가 예쁜 꽃과 어울리지 않게 맺히기 시작한다
가을에 갈색으로 다 익은 열매는 배 모양 같은 모습이다. 겉이 오돌토돌 한 모습으로 볼 품 없이 익어가지만 세로로 갈라진 그 안을 보면 어이가 없을 정도이다. 흰 솜털을 달고 씨앗들이 가득 들어있다. 바람에 퍼져 나가는 모양은 가관이다. 민들레 홀씨 날리던 봄처럼 바람 부는 가을날 씨앗을 날리는 재미를 박주가리로 만끽한다.
너무 많아서 씨앗의 숫자를 셀 수가 없었다. 마르면 저절로 벌어지기 시작하여 날린다. 낙하산처럼 활짝 깃털을 날리며 나는 모습은 민들레 씨앗과 닮았다.
봄까지 보기 위해서는 박주가리 씨앗을 고무줄로 꽁꽁 묶어 뒀다 꺼내서 아이들에게 주면 놀잇감으로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