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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밭

by 빨강

비닐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습한 땅에서 덜 마른빨래 냄새가 났다.

그녀와 나는 포도나무 사이의 고랑을 걸었다. 신발이 흙에 푹푹 빠졌다. 걸어가는 길마다 발자국이 뒤따랐다. 머리 위로 포도나무 덩굴이 엉켜 있었다. 마른 나뭇가지에서 막 싹이 나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고랑을 계속 걸었다.

찢어진 비닐 사이로 새들이 날아와 눈앞을 어지럽혔다. 직박구리들이 날개를 쫙 펴고 낮게 날면서 위협했다. 그녀와 나는 그래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다음 나뭇가지에 싹튼 나뭇잎을 이정표 삼아 걸었다. 포도넝쿨에 채 따지 못해 시든 검은 포도들이 말라붙어 있었다. 바닥에 알알이 떨어진 포도를 짓이기며 걸어 나갔다.

한참을 걸었다고 생각될 때, 박쥐들이 포도 넝쿨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우리가 다가가자 푸드덕 여기저기로 날아다녔다. 박쥐가 날아오는 소리가 비닐하우스를 울렸다. 박쥐들의 높이 날다가 비닐에 날개를 부딪혔다. 우리는 앞으로 가기를 멈추지 않았다.

박쥐들을 지나자 나비들이 너울너울 날았다. 햇볕이 줄어들고 있었다. 비닐하우스가 붉어지는가 싶더니 깜깜해졌다. 길이 보이지 않아 넘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아갔다.

어둠 사이로 나방들이 푸득푸득 날았다.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나는 나방들이 산발적으로 모였다 흩어졌다가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손으로 나방을 쫒았다. 나방의 날개가 손날에 닿아 나방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날아올랐다. 계속 걸었다.

우리는 드디어 포도밭 끝에 다 달았다. 우리는 주저 없이 뒤돌았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온 길 보다 가는 길은 늘 그렇듯 가까워 보였다. 비닐하우스 끝쪽에 희미한 문이 보였다. 그 문을 열었다. 시원한 공기가 피부에 와닿았다. 끈적끈적한 손을 맞잡았다. 아주 어려운 길을 헤쳐 나온 것만 같았다. 소름이 팔뚝에 오소소 돋았다. 해가 뜨려면 아직 먼 것 같았다.



눈을 번쩍 떴다. 몸의 반이 이불 밖으로 나와 있었다. 등이 축축했다. 추웠다. 모로 돌아누웠다. 한기가 등줄기를 쓸어내렸다. 눈앞이 깜깜했다. 이불을 추켜 올렸다. 방 창밖이 푸르스름했다. 아직 여명이 밝지 않은 시간, 깜깜한 비닐하우스의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일어나야만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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