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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덩이

봄이 가고 여름이 온다

by 빨강




비가 온 뒤 길을 걷다 보면 웅덩이를 만난다. 손바닥만 한 웅덩이, 두 다리를 쩍 벌려야 건널 수 있는 웅덩이, 제각각 다른 모양을 하고 있다. 잘 만들어진 길에는 생길 일이 없는 웅덩이는 파이고 메운 흔적을 가지고 있다.


하루 종일 거칠게 내린 빗방울은 대낮에 웅덩이를 만들고, 비가 잦아들자, 빗방울이 웅덩이마다 파문을 만든다. 커다란 웅덩이에 수 십 개의 파문이 동그랗게 점점 커진다. 웅덩이 가장자리에 핀 민들레 이파리가 파르르 떨린다.


빗소리가 잦아든 동네에서 부추전 냄새가 난다. 빗소리는 기름 튀는 소리를 닮았다. 냉장고 야채칸에 잠자던 부추가 썰어져 밀가루 옷을 입는다. 지글지글 한낮의 프라이팬이 부추전을 익힌다.


사람들이 전을 찢어 먹을 때, 물방울이 전깃줄에 매달렸다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진다. 나뭇잎 사이에 숨어 있던 직박구리가 서러워 한번 울면 다른 데 숨어 있던 직박구리가 두 번 운다. 배고파 우는 서러운 소리가 동네방네에 울려 퍼진다.


벌레들이 비를 피해 감나무 이파리 뒤로 숨어든 시간. 나뭇잎 뒤에 숨어 연한 이파리를 갉아먹는 애벌레가 다음 이파리로 꼬물꼬물 기어간다. 연둣빛 몸이 펴졌다 오므라든다. 굵은 빗방울을 여러 번 맞은 파란 감꽃이 떨어지고, 세찬 빗줄기가 잘라낸 잔가지가 나무 밑에 흩어져 있다.


보도블록 사이에서 기어 나온 진흙색 지렁이가 돌아갈 길을 찾지 못하고 웅덩이에 갇혀 바닥에 가라앉아 있다. 두 뼘 안에 세상에서 애썼을 지렁이. 살았나 죽었나. 알 길이 없다. 순식간에 불어버린 웅덩이 안에서 나가려고 발버둥 쳤을 지렁이는 미동이 없다. 작은 세상이 다인줄 알고 살려고 애써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그 몸부림이 얼마나 처철한지.


비가 오면 9-3 버스가 3-3처럼 보이고 11번 뒤에 숫자가 아리송하다. 사람들의 바지 밑단에 튄 흙탕물 자국이 진해진다. 우산 쓴 사람 반, 접은 사람 반, 제 갈길을 부지런히 간다. 자전거가 지나간 자리에 바퀴자국이 물로 그려진다.


비가 그치자 잔잔해진 웅덩이에 세상이 비친다. 하늘은 아직 뿌옇고 구름이 덩어리 져 흘러가는데 쫄딱 젖은 세상에서는 물비린내가 난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냄새를 맡으며 우산을 접었다 편다. 빗방울이 다시 굵어지고 있다. 봄이 안개에 가려져 물러나고 있다. 여름이 웅덩이 안에서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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