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렷하게 볼 수 없는 세상
안경점 안에는 커피머신이 놓여 있었다. 안경사들은 똑같은 복장으로 커피를 내렸다. 백 평도 넘어 보이는 안경점 안에는 수없이 많은 안경테가 LED 불빛 아래서 자신의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딱 봐도 전혀 다른 안경테부터 비슷비슷해 보이는 안경테까지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고를 수 있는 안경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알이 너무 커도 안되고 작아도 안되고, 테가 얇아도 안 된다. 지금까지 안경사가 추천해 준 것을 써왔다. 나에게 안경은 패션과는 거리가 멀었다. 30년도 넘게 안경을 쓰다 보면 비싼 안경도 소모품이 돼버리고 만다. 없으면 한 치 앞도 안보이면서도 소중함과는 거리가 멀다.
시력이 많이 안 좋으시네요.
늘 듣는 말. 안경사에 말에 시큰둥하다. 안경을 써도 먼 건 먼 대로 가까운 건 가까운 대로 잘 보이지 않는다. 잘 보이는 게 뭔지 모르니 대충 보이기만 해도 아쉬움이 없다. 안경사의 말대로 적당히 멀리 보이고 적당히 가까이 보이는 도수를 선택한다.
초등학교 2학년 내 짝은 쌍둥이 남자애였다. 동생과 앞 뒤로 앉은 남자애는 내가 원피스를 입은 날이면 등 지퍼를 쭉 내렸다. 그럴 때마다 눈물이 찔끔 나면서 기분이 나빴지만 그 감정을 말로 표현할 줄 몰랐다. 어느 날부터 칠판의 글자가 안 보이기 시작했다. 쌍둥이 짝의 공책을 몰래 배겨 썼다. 눈치챈 짝이 공책을 보려면 백 원을 달라고 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보이지 않는 칠판을 쳐다보다가 백 원을 주고 말았다. 나는 그 쌍둥이 남자애에게 약점 많은 여자애였다.
앞이 안 보인다는 게 뭔지 몰라 2학년 겨울이 될 때까지 아쉬운 소리를 해야 했다. 엄마에게 지나가는 소리로 칠판이 안 보여라고 하자마자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안경점으로 갔다. 안경사는 왼쪽과 오른쪽 눈을 번갈아 가리고 숫자를 가리켰다. 안 보이는 숫자가 더 많았다. 안경사는 안경테를 이것저것 보여주었다. 나는 빨간색 안경을 갖게 되었다. 안경은 거추장스러웠고 자주 안경 쓰는 걸 잊었다. 하지만 학교에 갈 때는 꼭 쓰고 갔다. 칠판의 글자들이 또렷하게 보였다. 더 이상 짝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제일 좋았다.
안경 쓰는 아이들이 적었던 시절에는 안경을 쓰는 것도 놀림거리였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안경을 쓰면 세상의 모든 물체가 작아 보였다. 안경을 쓰기 전보다 작아진 세상은 덜 무서웠다. 눈은 나이가 들수록 더 나빠졌다. 세상이 뿌예질수록 경계가 희미해 보였다. 내 눈으로 보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글자도 그림도 멀어지면 왜곡돼 보였다.
내가 보는 세상은 구름 낀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듯이 항상 흐릿하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유지해야 그나마 보통의 범주 안에서 볼 수 있다. 선명한 세상을 본 지 오래된 지금, 점점 더 작게 보이는 세상에서 안경 안에 콩알만 한 눈을 크게 떠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