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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과 꿈 사이

by 빨강



모래뻘에서 손톱만 한 게들이 분주하다. 작은 굴 주위에는 작은 모래공 수십 개가 늘어서 있다. 게들은 잠자리를 찾아 자기 몸 크기만한 좁고 긴 굴을 판다. 작은 게는 작은 굴을, 큰 게는 큰 굴을, 몸에 딱 맞는 굴을 파고 들어가 선잠을 자는 게들. 모래뻘에 셀 수도 없이 많은 게들이 잠든다. 파도가 자장 노래를 부른다.



잠자리에 들기 전 샤워를 하고 선풍기 앞에서 머리를 말린다.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는다. 머리를 쓸어 넘기고 바람을 맞다 보면 몸에 한기가 든다. 숱이 많은 머리는 잘 마르지 않고, 삼십 분 정도 강풍에서 말려야 거의 마른다.

물을 한 컵 가득 따라 약을 먹는다. 그날의 약이 한꺼번에 몸속으로 삼켜진다.


침대에 왼쪽으로 돌아 누워 휴대전회를 본다. 남의 집 고양이들이 한가롭게 마거렛 꽃밭에 누워 있거나 산길을 달린다. 마음에 온기가 찬다. 잘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잠이 드는 건 늘 어려운 일이라서 평생 동안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을 끄집어 올려 반복적으로 떠올린다. 밤하늘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이팝나무 꽃이라든가. 담장 위에 고양이 새끼라건가. 그네를 타는 어린이들이라든가. 윤슬이 지는 바닷가 라던가. 미하엘 엔데 작가 책 모모에 나오는 시간의 방이라던가.

꽃이 피고 지는 생명의 유한함이 나를 안전하다고 느끼게 해 준다.

사실 가장 많이 떠올리는 건 몇 해 전 떠난 고양이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다. 그 안에는 나를 잠들게 하는 힘이 있었다.


자는 일은 늘 어렵다. 몇 시간씩 생각이 꼬리를 문다. 어디서부터가 내 생각이고 꿈인지 헷갈려서 잠에서도 혼란스럽다. 늘 안 좋은 기억은 잠자리에서 떠오른다. 왼쪽으로 뒤척 오른쪽으로 뒤척이며 생각을 떨쳐내려고 애를 쓴다. 꿈과 이어진 나쁜 기억들은 악몽을 부른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우리집 침대에 누워있다.


매일 밤, 간신히 잠이 들면, 꿈을 꾼다. 꿈에서는 어릴 적 친구들이 도망가고. 몇십 년째 본 적 없는 사람들이 조연으로 출현한다. 꿈은 또 꿈으로 이어져 있다.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꿈은 내가 자는 건지 마는 건지 알 수 없게 한다. 악몽은 매일 밤 다른 내용으로 나를 찾아온다.


자다 보면 등이 땀에 흠뻑 젖어 축축하다. 꿈에서도 꿈이란 걸 안다. 꿈이란 걸 알지만 악몽은 깨지 않고 계속된다. 자고 일어나면 마라톤을 한 것처럼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잠에서 깨면 굉장히 지쳐있다.


잠이 알아서 오던 날이 언제였을까. 불면과 함께한 삶이 내 생의 반을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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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