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이야기
지하로 가는 에스컬레이터 오른쪽에 선다. 왼쪽에 걸어서 내려가는 사람들이 지나간다. 앞에 할아버지 한 분이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서 있다. 하늘색 여름재킷이 잘 다려져 있다.
개찰구 잎에 지하철이 막 도착했다는 그림과 함께 알림음 소리가 역사를 울린다. 카드를 찍고 급하게 들어서지만 계단을 반도 내려가기 전에 올라오는 사람들과 마주친다. 열차 문이 닫히고 급하게 열차가 출발한다
내리는 역 출구와 가까운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8-3번 타는 곳 뒤 나무벤치에 아주머니 세 분이 앉아 있다. 세 분은 심각한 얼굴로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고 있었다.
그 양반 결국엔 고생만 하더니 지난주에 갔대.
모르는 사람의 부고를 듣는다. 아주머니들은 아프지 않고 죽는 게 복이라면 서로가 아는 건강정보를 주고받는다. 여름이라 콩물이 좋다고. 병아리콩을 불렸다가 삶아서 소분하는 방법에 대해. 비타민은 아침에 먹는 것이 좋다고. 산책은 하루에 30분은 해야 한다고. 햇볕을 머리에 쬐는 게 좋은데 뜨거울 땐 모자를 써야 한다고. 아줌마들의 건강정보는 지하철이 도착할 때까지 계속됐다.
열차 도착 알림음이 울리자 자리에서 일어난 아줌마들이 8-3 앞으로 천천히 걸어온다. 무릎이 시원찮은 한 분이 다리 한쪽을 끌며 걷는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나란히 비어있는 좌석이 없자 다리가 불편한 아줌마에게 다른 아줌마들이 앉으라고 손짓을 한다.
자기가 앉아.
자리에 앉은 아줌마는 다른 아줌마들의 손가방을 받아 든다. 백팩을 무릎 위에 놓은 옆자리 학생이 자리에서 일어나 옆칸으로 간다. 그 자리에 다음으로 많이 아픈 아줌마가 앉는다. 아줌마들 사이에 서로에 대한 배려가 배어있다.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손잡이를 잡았다. 눈으로 지하철 벽면에 붙은 광고를 읽는다. 임상실험자를 모집하는 공고. 남대문 닭 한 마리 사진, 장어 사진 밑에 크게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넓은 홀, 넓은 주차장.
음악소리 사이로 아줌마들의 대화소리가 간간이 들린다.
거기가 약이 제일 싸다니까.
삼총사 아줌마들의 종점은 종로. 한 시간도 넘게 지하철을 타고 조금이라도 싸게 약을 사러 가는 길. 혼자 가는 길이 쓸쓸할까 봐 셋이 함께 가는 길.
이수역을 지나자 지하철에 햇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한강물이 반짝반짝 빛나고 지하철에 앉아있는 아줌마들 머리 뒤로 후광이 비친다. 조용해진 지하철 안. 아줌마들이 창밖을 내다본다. 지하철 옆을 달리는 차들이 속도를 내며 멀어진다. 지하철이 다시 지하터널로 들어간 다. 눈앞이 침침하다. 아줌마들의 눈꺼풀이 빠르게 깜박인다.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 끝도 없고, 시작도 없는 이야기. 삼총사가 살아온 이야기. 엿들으려고 한 것도 아닌데, 안 들으려고 해도 들려서 듣는 이야기.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혼자 가는 길이 혼자가 아닌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