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떠오르고
초등학교 앞 사거리에 오디나무 한그루가 초여름의 햇살을 받고 이파리를 날개처럼 펼치고 있다. 봄에 피었던 꽃들이 열매가 되었다. 까맣고 작은 열매가 이파리 사이에 쉼표처럼 달려있다. 오디나무는 열매를 많이 맺었다. 다 익은 열매는 이틀을 가지 못하고 나무에서 떨어졌다. 떨어진 열매들이 어린이 안전 구역인 엘로우카펫에 얼룩덜룩하게 찍혀 있다. 나무 앞 뒤로 10미터가 검은 열매의 과즙으로 새까맣다.
사람들의 발자국을 피해 개미는 쉬지 않고 바닥의 오디를 턱으로 잘라 나른다. 오디가 짓이겨진 자국은 마른 핏자국 같기도 하다.
오디나무 밑을 지나자 신발 바닥이 보도블록에 쩍쩍 달라붙는다. 신발 바닥에 붙은 열매를 잔디에 비벼 닦는다.
저녁을 먹고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유모차를 밀며 간다. 어느 유모차엔 아이가 타고 있고 어느 유모차에는 눈물자국이 붉은 강아지가 타고 있다.
유모차가 지나간 자리 3미터 앞 바닥에 흰 천이 떨어져 있다. 가까이 가보니 앙증맞은 무늬가 있는 가재수건이다. 아이가 빨다 놓쳐버린 가재수건은 모서리가 젖어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여러 개다. 누가 보느냐에 따라 처절하게도 슬프게도 평범하게도 기쁘게도 느껴진다. 똑같은 풍경 속에는 다양한 사람의 감정이 있다.
유리병 속에는 오디 열매 반 술 반이 담겼다. 그 앞에서 플라스틱 바구니에 씻어놓은 오디를 집어 먹었다. 오디를 한입 먹으면 입안이 까매졌다. 오디를 먹은 게 언니였는지, 나였는지. 술을 담은 게 할머니였는지 엄마였는지 알 수 없는 기억이 학교 앞 오디나무를 지날 때마다 떠올랐다. 쨍쨍한 한낮 마당에서 익어가던 기억. 그 기억이 왜 슬프게 자리 잡고 있는지.
어떤 풍경 앞에서 떠오르는 기억은 사람의 역사를 대변한다. 과거의 감정이 현재를 만든다. 나무에서 나는 단내가 기억을 불러오고, 과거의 눈으로 현재를 본다. 그때의 감정이 갑자기 가슴에 들어찬다.
초등학생인 내가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깜박깜박하는 파란불을 따라 세상이 흔들렸다가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