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aquel

신은 바람과 같아

by 한스푼

Raquel의 고향은 코스타리카이다. 코스타리카의 언어는 스페인어. 남편 David가 한국의 카이스트에 교환학생으로 오게 되면서 한국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Raquel이 할 줄 아는 언어는 모국어인 스페인어뿐이라, 남편 없이는 마트도 편히 갈 수가 없었다. 한국사람들은 외국인으로 보이면 모두 영어로 말을 건넸다. 그 말을 알아들을 수도 없고, 혹여나 눈치껏 알아 들었어도 영어로 답변을 할 수가 없었다. 언어가 되지 않으니 모든 것들이 불편했고, 평일에 집에만 있으니 심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반면 David는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했고, 연구실 동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한국어도 실력도 쑥쑥 늘었다.


한국에 온 지 5개월이 지났을 무렵, David가 카이스트 어학당에서 들을 수 있는 영어회화 수업을 등록해 주었다. Raquel은 수줍음이 많았지만 용기를 내어 첫 수업에 들어갔다. 교환학생의 가족들도 있었고, 한국 학생과 일반 성인들도 있었다. 첫 시간은 자기소개 위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3개월 동안 소그룹으로 수업도 하고, 여러 가지 재밌는 과제도 그룹원들과 함께 했다. 기초 영어 수업반이라서 그런지 함께 수업을 듣는 친구들도 영어를 잘 못했고, 오히려 손짓 몸짓으로 알아듣는 내용이 더 많았다. Raquel은 발음이 좋고 표현력이 풍부하다는 칭찬도 들어 이 수업이 점점 재미있어졌다. 소그룹 친구들과는 수업 후에 가끔 점심도 함께 먹으며 영어를 더 많이 연습하기도 했다.


소그룹 친구였던 지수가 한국음식을 잘 먹는 Raquel을 보더니

"Raquel, 주말에 시간이 되면 남편과 함께 우리 집에 오지 않을래? 내가 진짜 한국음식이 뭔지 알려줄게!"

Raquel은 사진으로만 보았던 지수의 아이들이 궁금하기도 했고, 남편과 함께 갈 수 있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이번 주말에 가겠다고 약속을 했다. 주말에 David와 함께 지수에게 선물할 찻잔 받침대와 코스타리카 과자를 챙겨 지수집으로 향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세명의 아이들이 Raquel과 David를 보자마자 뒷걸음질 치며 지수와 지수 남편 상철이 뒤로 숨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방긋 웃어주며 한국어로 인사를 건넸다. 지수는 거실에 커다란 밥상을 펴고, 음식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잡채, 김치찌개, 계란말이, 멸치볶음, 김밥, 오이무침을 한창 차려냈다. 생소한 맛의 음식도 있었지만, Raquel은 맛있게 먹었다. 특히 김밥과 김치찌개가 정말 맛있었다. 상철이는 영어를 잘해서 David와 이야기가 잘 통했고, 지수와 Raquel은 둘만의 수다를 떨었다. 시간이 흐르자 지수의 딸들도 Raquel의 머리카락도 만져보고, 눈동자도 가만히 들여다보며 코도 만지작만지작. 아직 자녀가 없는 Raquel은 아이들의 손길이 따뜻하고 보드라워서 가만히 얼굴을 내어주었다. 까르르 웃는 모습에 덩달아 웃음이 났고, 마지막에는 포옹도 할 수 있어 한없이 따뜻했다. 집에 가는 길에 지수가 무언가를 손에 쥐어 주었다. 김밥을 잘 먹는 Raquel을 보았는지 김밥과 김치를 담아 주었다. 집에 와서 저녁으로 지수가 싸 준 도시락을 먹으며 David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수 가족처럼 아이를 많이 낳자, 지수네와 자주 만나고 싶다 등등.


3개월의 수업이 끝나고 맞이한 겨울방학. 수업이 끝나도 Raquel과 지수는 일주일에 두 번씩은 만나서 같이 영어로 대화하고, 서로 각자 자신의 모국어도 가르쳐주었다. 덕분에 지수는 스페인어를, Raquel은 한국어 배울 수 있었다. 코스타리카에서 늘 봉사활동을 한 Raquel. 한국에서도 봉사활동을 하고 싶었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지수에게 부탁을 했다.

"지수야, 자원봉사 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지수는 이곳저곳을 알아보더니, 지역아동센터에 가서 함께 스페인어를 가르쳐 보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모국어인 스페인어를 가르치는 건 쉽기도 했고 뿌듯한 일이기에 함께 하기로 하고, 어떻게 진행을 할 것인지에 대해 포트폴리오를 짰다. 우선 초등학생들이었기에 노래로 배울 수 있는 것들을 준비했다. 인사노래와 숫자노래 등등. 지역아동센터의 아이들은 외국인인 Raquel을 신기해하며 적극적으로 반겨주었다. 노래와 율동을 하며 한 시간을 즐겁게 보내고 오면 몸과 마음이 뿌듯했다. 지수도 덩달아 신이 나서 정말 열심히 함께 해주는 모습에 한없이 고마웠다.


Raquel은 한국에 와서 눈을 처음 보았다. 지수의 차를 타고 눈 오는 날 아동센터로 가는 날, 차 앞유리창으로 눈이 쏟아졌다. Raquel은 손으로 얼굴을 막으며 눈을 피했다. 물론 차 안으로 눈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꼭 눈이 얼굴로 들이치는 것 같았다. 지수는 그 모습이 웃겼는지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Raquel, 너 왜 그래? 눈은 차 안으로 못 들어와. 설마 너 눈을 처음 보는 거야?"

"지수야, 난 살면서 영화에서만 눈을 보았지 이렇게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야. 코스타리카에서는 눈이 내리지 않아. 근데 정말 신기한 게 뭔 줄 아니? 눈이 눈으로 꼭 들어와 앉을 것만 같아!"


크리스마스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지수는 이웃들과 함께 아파트 노인정 할머니들을 위해서 파티를 준비한다고 했다.

"Raquel, 너와 David도 함께 할래? 정말 재밌을 거야. 우리 캐럴도 부르며 율동도 하고, 할머니들과 게임도 할 거야. 그리고 각자 집에서 음식도 한 가지씩 만들어와서 나눠 먹을 거고. 너도 기독교라고 했으니까, 함께하자. David와 상의해 보고 알려줘."

Raquel은 고민이 되었다. 하느님 신을 믿는 종교이지만, 개신교가 아니라 유대교였다. 예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아, 아기 예수가 탄생한 크리스마스는 의미가 없는 날이기 때문이다. David와 상의 끝에 그래도 축제처럼 함께 모여 즐기는 자리니까 함께 하기로 했다. 지수가 알려준 캐럴과 율동도 열심히 배우고, 코스타리카 타코도 만들어 노인정으로 갔다. 할머니 20분과 지수네 이웃들. 이웃들의 자녀들은 모두 4명씩이라 총인원이 40명 남짓. 노인정은 팔각정으로 지어진 둥근 형태의 커다란 건물이었다. 식탁도 여러 개가 있어서 가지고 온 음식들은 나누어 맛있게 먹었다. 식사 후 이어진 노래와 율동, 아이들의 재롱잔치까지 흥겨움이 가득했고, 할머니들과 함께 한 게임은 배꼽을 잡고 웃으며 신나는 시간을 보냈다. 크리스마스 축제를 즐기기를 잘했다며, 돌아오는 길에 David와 Raquel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크리스마스 이후에 지수와 만난 날. Raquel은 지수에게 본인의 종교를 알려주었다. 지수는 미안하다며 자기가 실수한 것 같다고 했지만, Raquel은 괜찮다고 덕분에 즐거웠다고 이야기를 했다. 지수는 일요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집에서 쉰다고 했던 Raquel의 말이 생각이 났다. 유대교는 7일째 되는 일요일에는 밥도 하지 않고 쉰다고 했다. 식사 음식은 그전날 미리 만들어놓는다고. 한국에서 기독교는 모두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기에 지수는 Raquel도 당연히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줄 알았다. 지수는 종교가 없다. 그래서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Raquel, 너는 신이 있다고 믿지? 그런데 신이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어?"

"음.. 신은 바람과 같아. 보이지 않지만, 그분의 목소리는 들려. 그리고 느낄 수 있어.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들리고 느껴지잖아."

"우와~ 비유가 정말 딱이다! 뭔지 알 것 같아. 알려줘서 고마워."

지수에게 신에 대해 이렇게 명쾌하게 알려준 사람은 Raquel이 처음이었다. 다른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태초에부터 시작해 성경의 말들을 늘어놓아 신이 있는지 없는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질 때가 많았다.


David가 졸업을 하면서 다시 코스타리카로 돌아가게 된 Raquel. 지수와 함께 보낸 2년 동안 Raquel은 한국 속으로 흠뻑 빠져들었다. 한국 사람들과 음식, 문화 모두 익숙해졌는데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니 아쉬움이 너무 컸다. 한국에서 사용했던 가구와 생활집기들도 모두 처분을 해야 했다. 지수에게 먼저 가지고 가고 싶은 걸 고르라고 했을 때, 지수는 커피잔을 골랐다. 커피를 좋아하는 지수는 민무늬 흰색의 커피잔을 좋아했다. 우리가 늘 함께 마시던 커피잔. 지수는 커피잔을 가지고 가고 싶다고 했다. 지수집에는 식탁이 없었다. 좌식으로 식사를 해서 Raquel과 David는 지수 집에서 식사를 할 때면 늘 다리 저림으로 곤욕을 치르곤 했다. Raquel은 지수에게 식탁과 의자도 주고 싶다고 했다. 지수가 정말 가지고 가도 되냐며 좋아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날 지수는 평소에 Raquel이 좋아했던 미숫가루와 매실액을 선물로 가지고 왔다. 비행기로 가지고 갈 수 있게 모두 압축을 해서 포장해서 오는 센스. 여름에 얼음 동동 띄워 먹는 매실은 정말 일품이었다. 지수집에서 매번 얻어와서 여름에는 시원하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차로 마셨다. 우유에 넣어 먹는 고소한 미숫가루는 식사대용으로 아주 좋았다. 고향에 돌아가도 계속 생각이 날 것 같았는데, 지수는 Raquel의 마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이별 선물로 가지고 왔다. 지수네 가족사진과 편지도 함께. 둘은 3시간 동안 그동안의 추억을 회상하며 서로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다.




Raquel이 고향으로 간지 1년이 지났을 즈음에 David가 한국에 잠시 들어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전해 줄 것이 있다며 서울에서 만나자고 했다. 지수는 서울 어느 식당에서 David를 만났다. 너무 반가워 눈물이 핑 돌았다. 식사를 하며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Raquel은 잘 지내는지 이것저것 묻고 답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식사 마지막에 David는 커다란 가방을 지수에게 건넸다. Raquel이 챙겨 준 선물이라고 했다. 집에 와서 가방을 열어보니 코스타리카 커피와 과자, 스페인어 공부책, 아이들에게 전해 줄 코스타리카 동화책과 미술용품들, 코스타리카에서 생산되는 마시는 차들과 기념품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한국어로 쓴 편지와 함께.

"지수야, 잘 지내고 있지? 나는 매일 너와 함께 한 날들을 추억하며 너를 위해 기도하고 있어. 한국에서 베풀어준 너의 사랑과 관심 모두 감사해. 나의 친구가 되어줘서 고마워. 바람이 불면 내가 너의 곁에 있다고 생각해 주렴."




Raquel은 메일을 받았다. 지수 남편 상철이였다. 지수가 하늘나라로 떠났다는 글과 장례식에 초대한다는 내용의 메일이었다. 이번 달 말에 장례식을 진행할 예정이고, 비행기표는 David와 함께 올 수 있게 왕복 2장을 준비했다고 했다. 그리고 지수의 편지도 함께 보내주었다.

Mi amiga Raquel
¿Cómo estás?

나는 지금 아파.
너에게 이렇게 이별 편지를 남길 수 있음에 감사해.
내 사랑하는 친구 Raquel.
너와 함께 한 모든 시간이 소중했어.
나의 친구가 되어줘서 고마워.
난 바람이 되어 너의 신과 함께 있을 테니
너무 슬퍼하지 마.
바람이 불면 내가 함께 있다고 생각해 줘.
David와 너의 자녀들과 함께 행복하고 즐거운 소풍 같은 인생을 즐기다
내가 있는 곳으로 오기를.


Raquel은 상철이에게 장례식에 가겠다고 알린 후, David에게 소식을 전했다. 그날 밤 둘은 지수를 위해 기도를 드렸다. 신께 빌었다. 자기가 신께 갈 때까지 지수를 잘 지켜달라고. Raquel은 바람이 불 때마다 지수를 생각했다. 그녀와 함께 한 추억을 음미하며. Raquel은 뒷마당에서 지수에게 전해 줄 이별편지를 쓰며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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