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이

아가씨

by 한스푼

현이는 상철이의 여동생이다. 현이가 대학3학년이 되었을 때, 오빠가 집으로 여자친구를 데리고 왔다. 말수도 별로 없던 오빠가 처음으로 여자를 집으로 데려온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그 여자가 키가 크고 깡 말라 신경에 거슬리기도 했다. 오빠가 다녀간 후 엄마는 그 여자가 맘에 든다고 했다. 엄마는 늘 오빠를 '조선팔도에도 없는 우리 상철이'라고 불렀다. 현이는 오빠만 챙기는 엄마의 편애가 늘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 여자가 다녀간 후로 현이에게 전화해 "현아, 너도 지수처럼 살 좀 빼. 날씬하니가 얼마나 이쁘냐. 지수 보고 반성해라." 엄마의 압박이 시작되었다.


오빠가 다녀간 지 1년 후, 키가 크고 깡마른 그 여자 지수가 현이의 새언니가 되었다. 그 여자는 오빠보다 훨씬 털털한 성격이었고, 용돈도 곧 잘 보내주는 새언니 지수로 현이의 마음이 점점 변해갔다. 가끔 현이에게 전화해 상냥하고 따뜻하게 안부를 묻는 새언니가 조금씩 편해질즈음, 엄마의 특명을 받은 현이.

"오빠 신혼집에 다녀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내가 직접 가고 싶은데, 며느리가 불편할까 봐 못 가겠어. 그러니 네가 대신 다녀와."


현이는 내심 신났다. '드디어 서울을 가보는구나.' 현이는 제주도에서 나고 자라 육지로 나갈 일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새언니가 김포공항으로 픽업을 왔고, 그때부터 둘은 5일간의 즐거운 일정을 함께 했다. 현이는 디자인학과 졸업반이었다. 현이를 위해 새언니는 파주헤이리마을, 국립현대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등 건축물이나 디자인 관련된 곳으로 안내했다. '기회가 되면 서울로 와야지!' 현이는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새언니가 사준 유럽의 미술관 박물관 책들이 현이의 사고를 확장시켜 주었다.


마지막날 밤 새언니와 현이는 새로 출시된 BBQ 매운 양념 치킨과 맥주를 마시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으로의 목표와 계획, 남자친구 이야기까지 속 마음을 모두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로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면 서로 이야기를 편하게 하자고. 약속까지 했다. 불편한 사이의 새언니와 아가씨의 관계가 아니라, 친구처럼 지내자고 합의를 했다. 현이는 오빠와 가져보지 못한 유대감을 새언니에게 느끼며 둘은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엄마에게 새언니의 칭찬을 줄줄이 쏟아내고, 오빠와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보고했다. 현이는 졸업 후, 디자인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해졌다.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서울에 있는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마침 오빠의 부대도 경기도 포천에서 경기도 남양주로 이동을 한다고 했다. 지하철로 서울에 있는 아카데미를 다니면 되었기에 새언니에게 바로 전화를 했다. 새언니는 언제든지 환영이라며 빨리 짐을 싸서 올라오라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동거. 오빠는 부대일로 항상 바빴고, 새언니와 현이는 친자매처럼 허물없이 지냈다. 조카가 생기면서 현이의 삶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아카데미를 다녀오면 밤에는 육아를 도왔다. 꼬물꼬물 본인을 꼭 닮은 첫 조카.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그런데 조카의 첫돌이 지나자마자 현이에게 둘째 셋째 조카가 생겼다. 이번엔 쌍둥이였다. 새언니의 배가 점점 불러오고, 몸이 무거워짐에 따라 현이의 육아돌보미는 주말에도 계속되었다. 현이는 또 다짐을 했다. '육아에서 벗어나야 해! 쌍둥이가 태어나면 이 집을 떠나 독립하리라!'


새언니가 쌍둥이를 낳기 전에 선언을 했다. 육아가 너무 힘들고, 아카데미 수업에 지장을 준다고. 그래서 쌍둥이가 조리원에서 올 때 독립을 하겠다고. 새언니는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며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리고 서울에 친구가 혼자 살고 있는데, 그곳에서 함께 지낼 수 있는지 알아봐 주겠다고 했다. 다행히 현이의 독립은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가끔 주말에 오빠네 집으로 가서 조카들을 돌봐주었다.


엄격한 오빠와는 달리 모든 것을 '현이야 괜찮아.'라며 위로해 주는 새언니가 있어 현이는 사소한 고민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오빠네 가족들이 여행을 가거나 제주도로 내려갈 때면 새언니는 늘 현이에게 먼저 연락을 했다. "아가씨~ 이번 주말에 3일 동안 우리 집 비어 있어. 맥주랑 간식 사다 놨고, 음식 몇 가지 해 놓을 테니 친구들이랑 와서 놀다가. 집 청소 해놓고 가는 거 잊지 말고. 오빠한테는 비밀!" 새언니 덕분에 친구들과 때로는 남자친구와도 오빠네 집에서 주말을 보내고 올 수 있었다. 새언니와 둘만의 비밀이 무성하게 많아질 때쯤 제주도로 다시 내려가게 된 현이. 아쉽지만 새언니 덕분에 5년 동안 서울 생활을 만끽했다.


결혼을 하고, 아들 둘을 낳아 기를 때도 현이는 휴일이 길 때마다 육지에 있는 오빠네로 여행을 갔다. 새언니는 현이의 아들들을 위해 놀이동산, 동물원을 데려가 주었고, 현이와 현이 남편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아이들을 돌봐주었다. 덕분에 현이 내외는 아이들이 있어 가지 못했던 영화관 나들이, 지글지글 불판에서 먹는 삼겹살, 노래방도 갔다. 새언니에게 감사함을 전하자, "아가씨가 예전에 주말에 우리 집 와서 애들 봐줬을 때, 오빠랑 나도 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었어. 그게 얼마나 달콤하고 감사한지 나도 알아. 숨 쉴 곳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아이들 데리고 와. 내가 잘 돌봐줄게."라고 얘기하는 게 아닌가. 엄마가 된 현이의 마음까지 알아주는 새언니가 정말 고마웠다.




새언니의 부고 소식을 들은 지 한 달이 지났을 즈음, 오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새언니 장례식에 초대를 한다고. 늘 엉뚱하고 도전을 좋아했던 새언니 답다고 현이는 생각했다. 메일로 발송된 편지 두장을 열어보았다.


내 동생 현이야.
네가 나의 아가씨라서 정말 행복했어.
오빠와 달리 너와 난 정말 잘 맞았지.
내가 쿵! 하면 너는 짝! 을 했지.
조용하던 오빠와는 달리 밝고 유쾌한 네가 난 참 마음에 들었단다.
막내인 나에게 쿵짝이 잘 맞는 동생이 생겨 좋았어.
우리 둘 다 서로에게 서운한 마음, 행복한 마음, 고민들을 나눌 수 있어 고마웠어.
현이야~
우리가 함께 독일 홈브로이히 박물관 섬에 갔던 때 생각나니?
노이스에 머물면서 매일 그 섬에 다녀왔잖아.
조식을 먹으러 가는 것처럼 우리는 작품들을 감상하고, 카페테리아에서 신선한 과일과 빵을 먹었지.
난 그 섬의 느낌이 아직도 가슴에 가득히 남아있어.
작품에 대한 너의 생각을 들을 때면 나의 세계가 확장되는 것 같아 좋았어.
언니가 먼저 바람이 되어 그곳에 가 있을 테니,
언니가 보고 싶어 견디기 힘겨울 때면 홈브로이히 박물관 섬으로 오렴.
사랑한다 내 동생 현이야.


새언니의 편지를 읽자마자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언니를 만나볼 수 없음에, 손을 잡고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음에 슬픔이 밀려들어왔다. 한참을 마음을 추스르고, 새언니에게 전해 줄 이별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나의 새언니 지수언니
나 현이야.
우리가 함께 했던 에피소드 중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할까 해.
내가 처음 언니네 신혼집에 갔을 때,
마지막날 우리는 치맥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지.
그리고 그다음 날 김포공항으로 나를 데려다 주기 위해 차를 탔을 때,
갑자기 언니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어.
주유소를 잠시 들르자고 하면서 차에 주유를 하고,
언니는 화장실을 다녀왔지.
그리고 5분 후, 다시 주유소를 들러 화장실을 또 다녀왔어.
난 걱정이 되어 괜찮냐고 물어봤어.
언니는 "현이야 이젠 괜찮아. 어제 먹은 매운 치킨이 장트러블을 일으킨 거 같아."라고 얘기했어.
시골길을 지나 서울외곽고속도로로 진입한 차는 10분도 채 가지 못하고 갓길에 멈춰 섰어.
비상등을 켜고, 주유소 화장지를 챙겨 갓길 가드레일을 뛰어넘어 눈 덮인 밭으로 뛰어 내려가더니 커다란 바위 뒤에 숨어서 참았던 묽은 응가를 했던 언니.
난 차 밖으로 나와 "언니! 지수언니! 어디가? 괜찮아? 언니 그런데 뒤에서 개가 와. 조심해!"
언니는 괜찮다고 손을 흔들어 보였지만, 난 계속 소리쳤어.
"언니! 뒤를 봐! 개가 뛰어 온다고!"
언니는 그제야 뒤를 돌아보고, 화들짝 놀라 부랴부랴 뒤처리를 한 후 옷을 입고 달려왔어.
다행히 개는 언니의 응가 쪽에서 멈춰 섰고,
헐떡이는 언니의 손을 잡아 가드레일을 넘어올 수 있게 잡아주었어.
난 그때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가 없던지.
우사인볼트보다 빠른 언니의 달리기 솜씨에 놀라고.
아무 곳에서나 응가를 하는 새언니가 정말 흥미로웠어.
우리는 차에서 한바탕 웃었고, 다행히 언니의 장은 괜찮아졌어.
집에 와서 엄마한테 이 이야기를 배꼽 잡고 했어.
엄마는 걱정이 되었던지 집에 있는 매실액을 언니에게 5통이나 보냈지.

기억을 더듬어 보니 언니와 함께한 즐거운 일들이 정말 많아.
오빠와 결혼해 줘서 고마웠어.
그리고 날 꼭 닮은 조카를 낳아준 것도.
언니 보러 독일로 날아가야겠다.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언니가 너무 보고 싶거든.
언니를 만나 나도 행복했어.
고마워. 내 사랑 지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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