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난 나에게 넌
기미내와 지수는 같은 대학교를 다녔다. 4년 동안 서로 알고 지내진 못했지만, 대학원을 가서 기숙사 룸메이트가 되었다. 대학원생 시절 초반에는 밤샘 실험도 많고 바빠서 기숙사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칠 일이 많지 않았다. 방학이 되면서 둘은 자주 마주쳤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었다. 지수는 반도체공학을 기미내는 의용공학을 전공하며 서로의 힘듦과 연구활동을 나누었다.
서로의 얼굴이 익숙해지니, 기미내는 지수가 누군지 생각이 났다. 지수는 학부생일 때 학교 기숙사에서 유명한 아이였다. 기미내의 같은 과 남학생이 기숙사 식당에서 정말 신기한 애를 봤다고 했다.
"야 기미내! 나 오늘 아침에도 걔 봤다. 한스푼! 우와 진짜 입이 크더라."
지수는 의용공학과에서 한스푼으로 통했다. 깡마르고 이쁘장한 여자애가 있는데, 밥을 먹을 때 숟가락으로 한스푼 가득 담아 입에 넣는다고 했다. 밥도 고봉밥을 먹는다나 어쩐다나. 남자애들 사이에서 꽤 유명한 아이가 바로 지수였다.
기미내는 지수에게 한스푼 이야기를 했다. 그게 바로 너라고. 지수는 깜짝 놀라며, 자기가 그렇게 유명한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기미내, 우리 아빠가 엄청 엄격하셨거든. 젓가락으로 밥을 먹으면 매 맞았어. 그래서 늘 밥은 숟가락, 반찬은 젓가락을 사용했단 말이야. 근데 웃긴 건 뭔 줄 아니? 아빠는 늘 밥을 젓가락으로 드셨다는 거지. 쩝. 아무튼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도 밥을 먹을 땐 숟가락으로 먹어. 습관이 참 무서워."
기미내와 지수는 졸업을 하고도 같이 자취를 하며 취업 준비 기간을 가졌다. 지수는 요리와 청소, 기미내는 설거지와 빨래를 좋아했다. 성격도 둘 다 둥글둥글해서 같이 사는 동안 편안했다. 지수는 취업을 했고, 기미내는 서울에 있는 학교에 박사과정을 들어갔다. 삶이 지쳐 힘이 들 때면 둘은 여행을 갔다. 걷는 걸 좋아하는 지수는 도보여행 스케줄을 짜놓고 기미내를 불러냈다.
"무조건 같이 가야 해! 나 힘들어."
기미내는 지수의 부탁을 늘 거절할 수가 없었다. 함께 있으면 재밌기도 하고 가장 편한 친구니까.
지수가 결혼을 하고 상철이와 싸운 날이면 늘 기미내에게 전화를 했다.
"기미내, 뭐 해? 나 정말 짜증나고 힘들어. 너한테 가도 돼?"
지수는 버스를 타고 서울로 와서 기미내와 맛있는 저녁을 먹고, 학교 기숙사로 몰래 숨어 들어가 하룻밤을 묵어가기도 했다. 기미내가 취직을 해서 오피스텔에 살 때는 거의 자기 집인 양 드나들었다. 남자친구가 없었던 기미내는 지수가 올 때면 반가웠다. 대학원생 때를 회상하며 깔깔대기도 하고, 또라이 같았던 선배들을 이야기하며 추억여행도 했다. 지수가 자주 오길 바랐지만, 아이가 한 명, 두세 명이 생기고 나니 지수의 외출 횟수는 확연히 줄어들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지수는 도보여행에 발동을 걸었다.
"기미내, 이번 주 주말에 도보 가자. 이번엔 이천이야."
"기미내, 충주 종댕이길 짱이야. 나 저번주에 가족들이랑 다녀왔거든. 여긴 너랑 꼭 가야 해!"
"기미내, 여름휴가 못 갔지? 10월에 나 일주일 휴가 받았거든. 제주도 6박 7일 어때? 걸어서 제주속으로!"
"기미내, 담양 가서 떡갈비 먹고 오자. 걷고 먹으면 꿀맛이겠지?"
"이번엔 양떼목장이다!"
지수는 자기와 함께 여행을 가주는 기미내가 고마웠다. 기미내만이 유일하게 미혼인 친구이기도 했고, 가족 다음으로 가장 편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기미내는 모든 스케줄과 음식까지 지수가 결정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지수가 가고 싶은 곳, 지수가 먹고 싶은 것, 지수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해주는 친구였다.
기미내는 회사의 업무에서 자기를 꺼내주는 지수가 고마웠다. 회사에서 직급이 올라갈수록 결정할 일들도 많아지고,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모든 걸 계획하고 결정해서 알려주는 지수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지수의 도보여행 시스템이 기미내는 참으로 좋았다. 아무 생각 없이 즐기다 오면 되니까. 좋아하는 음식도 둘은 비슷해서 지수가 찾은 식당의 음식 맛은 늘 최고였다. 하지만 도보여행을 1박 2일 이상 하고 오는 날이면 기미내의 발가락은 늘 멍이 들었다. 그만큼 힘들게 걷는 코스지만, 흠뻑 땀을 흘리고 먹는 밥은 꿀맛이기에 지수와의 여행은 힐링이었다.
기미내의 남편은 사과 과수원집 아들이다. 지수의 아이들이 기미내의 남편을 엄청 좋아했다. 남자친구일 때 지수집에 놀러를 갔는데, 지수네 딸들이 남자친구에게 매달려 떨어지지 않았다. 지수도 신기해했다. 아이들이 이런 적은 처음이라며. 아이들은 선하고 마음 좋은 사람을 바로 알아본다고 하지 않았나. 기미내는 아이들이 보증한 이 남자를 남편으로 맞이했다.
기미내의 결혼식에서 엄마보다 많이 울었던 지수. 누가 보면 사연이 많은 사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정도로. 지수는 손수건까지 챙겨 와 펑펑 울었다. 결혼을 하는 기미내가 대견하기도 했고, 평생 기미내를 곁에서 함께 해 줄 동반자가 있어 기뻤다. 그리고 결혼을 하면 이전보다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기에 아쉬움도 있었다. 그래서 결혼 전 기미내 남편에게 약속을 받았다.
"오빠, 나랑 기미내 도보여행 간다고 하면 무조건! 꼭! 보내줘야 해요. 약속해요. 빨리"
지수는 기미내와 함께 도보여행을 갔던 종댕이길 충주호 근처에 시골집을 지었다. 새집 선물로 사과나무 두 그루를 선물한 기미내. 지수는 해외여행을 가기 전에 기미내에게 집 열쇠를 쥐어주고, 잘 부탁한다는 말만 남기고 떠나버렸다.
지수와 상철이가 1년 동안 집을 비운 사이 기미내 가족들은 주말마다 시골집에 들러 삶의 온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늦게 결혼한 만큼 아이들도 늦게 낳아, 기미내의 아이들은 한창 마당에서 뛰어놀 나이였다. 아이들은 시골집을 좋아했고, 기미내도 세컨드하우스 같기도 하고 쉼이 있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지수의 투병 소식을 접하고 한 달에 한번 지수집을 다녀갔다. 지수는 점점 힘이 없어지고 있다고 했다.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는 글을 쓰고 있는 중이며, 모든 것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상철이에게서 지수의 장례식 문자를 받고 기미내는 엉엉 울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이렇게 큰 소리로 펑펑 울었던 적이 없었다. 지수가 그리웠다. 늘 보고 싶었다. 이제 지수와 함께 걷지도 먹지도 못한다고 생각하니 너무 슬펐다. 함께 할 수 없음이 이렇게 공허할 수가.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지만, 슬픔의 크기가 이렇게 클 줄이야.
기미내는 지수와 함께 했던 여행책을 보며 이별의 편지를 적었다. 함께 했던 그 소중한 이야기들을 편지에 담았다. 가장 아끼는 책과 편지를 준비하고 내일 시골집에 가져갈 사과를 챙겨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