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은이와 산이

빡신년

by 한스푼

정은이는 지수와 같은 대학교를 다녔다. 둘의 첫 만남은 기숙사. 4인 1실의 기숙사에서 2층 침대 위아래층을 나눠 쓰는 룸메인트. 성격이 쾌활한 정은이는 조용히 웃기만 하는 지수가 마음에 들었다.

"빡신년! 김지수! 오늘 수업 어땠어?"

정은이는 지수를 빡신년이라고 불렀다. 그게 친근함의 표시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날부터 지수가 정은이를 피하기 시작했다. 정은이는 섭섭한 마음에 지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기숙사 방에 둘만 남기를 고대했다.

두둥!

드디어 둘만 있게 되었을 때,

"야! 빡신년 김지수, 너 왜 나 피해?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지수의 눈에 갑자기 눈물이 고이더니

"너 왜 나한테 계속 욕하는 거야? 빡신년이라고. XX년은 비속어잖아."

"뭐? 그거 때문이었어? 빡신년은 욕이 아니야. 내가 애틋한 사람을 부를 때 칭하는 호칭이라고. 바보 김지수. 어리바리해 가지고 너 어떻게 살아갈래?"

"진짜? 욕한 거 아니라고? 난 네가 나한테 맨날 욕하면서 불러서 너무 무서웠다고. 나도 키가 크지만, 넌 나보다 훨씬 크잖아. 빡신년 김지수!라고 부를 때면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데.."

정은이는 오해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고, 지수도 정은이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낯선 설렘과 두려움이 가득한 1학년 1학기.

기숙사 점호를 마친 밤 11시부터는 룸메이트들끼리 그날 있었던 일들을 깔깔거리며 털어놓았다. 마음에 두고 있는 선배가 있는데, 자기 마음을 몰라준다며 울기도 했다. 서로가 서로를 응원도 하고, 함께 욕하기도 하고, 배꼽 잡으며 자지러질 때도 많았다. 한 학기가 훌쩍 지나 서로 다른 방의 기숙사를 사용했지만, 첫 번째 정이 무서운지라 4년 동안 정은이와 지수는 짬짬이 시간을 내어 안부를 주고받았다.

졸업 후 정은이와 지수는 다른 학교로 대학원을 진학하며 서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수에게서 연락이 왔다. 대학교 때 CC였던 상철이와 결혼을 한다고. 서로의 결혼식에서 얼굴을 본 이후로 아이를 낳고 키우느라 정신없이 살다 보니 한참 동안을 서로 만나지 못했다. 정은이는 남편의 직장이 가까운 대전에 둥지를 틀고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마트에서 장을 보다가 어디선가 많이 본듯한 여자가 카트를 끌고 가까이 다가오는 게 아닌가? 지수의 카트에는 첫째 아이가 앉아있었고, 상철이는 쌍둥이 유모차를 끌며 정은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정은이를 못 알아보고 지나친 지수. 정은이는 "빡신년 김지수!"를 외치자, 지수가 깜짝 놀라 뒤돌아보며 정은이에게 달려왔다. 둘은 마트 정육코너 앞에서 얼싸안고 발을 동동 구르며 반가워했다. 지수는 상철이의 근무지가 대전으로 발령을 받아 왔다고 했다. 둘은 아이들 어린이집을 보내놓고 평일 낮에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정은이는 꿈만 같았다. 대전에서 지수를 만나다니. 정은이도 타지와 와서 살면서 마음 나눌 사람이 없어 외로웠었는데, 이제 지수와 함께 지낼 수 있다니 정말 행복했다.

정은이와 지수는 매주 한 번씩은 만나서 그동안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달에 한 번은 온 가족이 만나서 소풍도 가고, 함께 배드민턴도 치고, 아이들 키즈카페도 함께 가며 이웃사촌이 되어갔다. 정은이는 딸 둘, 지수는 딸 셋. 아이들이 모두 동성이라 관심사도 같았다. 지수네와 함께 하면 아이들도 서로 잘 지내서 어른들도 육아가 수월했다. 지수는 여름방학이 되면 여름캠프를 열어 정은이의 두 딸들을 2박 3일 동안 물놀이를 데리고 가주기도 했다. 남편 산이는 안전예민증이 있어 아이들이 위험한 것을 참지 못했다. 지수네와 소풍을 가더라도 딸들의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녀서 민망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행히 지수와 상철이는 괜찮다며 그럴 수 있다고 항상 이해를 해주었다. 태어나서 야외 물놀이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정은이 딸들은 여름캠프가 열리는 날을 1년 내내 기다렸다. 정은이와 산이도 그날을 기다렸다. 3일 동안 아이들 없이 온전히 둘만의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어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즐길 수 있는 캠프기간이 얼마나 소중했던지.

산이는 아주 성실한 가장이다. 무언가를 시작하면 정말 끝장을 보는 스타일이고, 확실히 해내는 능력자이다. 정은이는 매사에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남편이 멋있어 결혼을 했지만, 결혼 후 모든 일을 성실히 하고 잘 해내려고 노력하는 산이가 힘들었다. 그만큼 육아와 살림은 모두 정은이의 몫으로 돌아왔으니. 산이는 불법주청차를 절대 하지 않는다. 정은이는 매사에 정도를 걷는 남편이 짜증이 났다. 잠시 갓길에 주차를 하고 아이들과 정은이를 내려주면 될 텐데, 주차장에 빈 곳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정말 융통성이 1도 없는 남편이 힘겨웠다. 하지만 지수는 산이를 정말 대단하다며 본받아야 한다고 늘 이야기했다. 우리 사회에 산이 같은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고. 산이를 멘토님이라 부르며 닮아가려고 노력을 했다. 정은이가 생각하는 남편의 단점을 친구인 지수가 좋게 바라봐주니 고마운 마음도 컸었다. 지수 가족들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이 편안한 분위기가 정은이는 참 좋았다.

정은이는 커피를 좋아한다. 자주 가는 동네 카페에서 핸드드립 수업을 진행한다는 정보를 듣고, 지수와 함께 수업을 들었다. 두 달 동안 커피의 역사와 산지, 맛과 향 등을 배우고 음미하며 커피에 한층 더 깊게 들어갈 수 있었다. 남편 산이도 커피를 좋아한다. 어느 날 산이가 생두를 시켜서 프라이팬으로 커피를 로스팅하기 시작했다.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하더니 그럴싸하게 로스팅을 하는 게 아닌가? 산이는 주말 내내 로스팅에 매달리더니 카페에서 파는 것보다 더 맛있게 로스팅을 잘하게 되었다. 지수에게 로스팅 원두를 선물해 줄 때면 멘토님 짱! 이라며 늘 엄지 척을 날려주었다. 지수는 2년에 한 번씩 이사를 한다고 했다. 대전에서 3년의 기간은 오래 있었던 것이라고. 지수의 이삿날. 정은이는 아쉬움을 가득 담은 포옹으로 지수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고, 서로의 건강을 기원했다.

이사 후에도 2~3년에 한 번씩 여름휴가를 함께 했었고, 크고 작은 일들이 있을 때마다 안부를 물으며 서로의 근황을 전했다. 2년 전에는 지수의 시골집으로 가서 함께 농사일도 하고, 화덕에서 빵과 쿠키도 구웠다. 전원생활을 만끽하며 여유로움을 즐기고 왔었다. 산이가 가마솥으로 지수가 좋아하는 에티오피아와 케냐의 생두를 볶아주고 왔다. 그때의 지수 함박웃음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1년 전에 지수에게 전화가 왔었다. 몸에 나쁜 손님이 찾아왔다고. 본인이 떠난 후에도 산이와 가끔 시골집에 들러 상철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오늘은 상철이에게 메시지가 왔다. 지수가 바람이 되어 하늘로 갔다고. 정은이는 이렇게 빨리 지수가 떠날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지수의 웃는 모습이 눈앞에 생생한데 지수가 이 세상에 없다니. 정은이는 지수의 편지를 읽으니 가슴이 먹먹해지며 울음이 차올랐다.

사랑하는 내 친구 정은아,
너와 산이에게 따로 부탁할 이야기가 있어 편지를 써.
장례식 둘째 날 아침에 커피를 부탁하려고.
산이가 로스팅한 원두로 핸드드립 커피를 내려줘.
우리 집에 드리퍼가 많이 있으니까 따로 장비는 준비해오지 않아도 돼.
로스팅된 원두만 가지고 와주렴.
내가 없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고.
난 항상 바람처럼 너의 옆에 있을 거야.
나에게 빡신년 김지수! 하고 불러주었던 너의 힘찬 목소리가 지금 내 귓가에 들려.
정은아, 너와 함께한 시간들이 오늘따라 더 소중하게 다가오는 것 같아 마음이 저려.
나의 멘토님 산이와 남은 시간을 더 행복하게 지내다 오렴.
나의 반쪽 상철이도 한 번씩 챙겨줘.
상철이가 외롭지 않게 불쑥 찾아가 성가시게도 해주고.
정은이의 친구로 살다가는 영광을 줘서 고맙다.

편지를 다 읽은 정은이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산이에게 이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타들어가는 가슴을 어떻게 진정시켜야 할지 몰라 눈물만 훔치고 있었다. 며칠 후 상철이에게 참석하겠다는 메시지와 함께 위로의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산이와 함께 지수의 장례식을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산이는 베란다에서 생두를 볶으며 눈물을 흘렸다. 산이는 주변 사람들에게 유별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하지만 아내의 친구인 지수는 산이의 가치와 신념을 늘 지지해 주었다. 자신을 멘토님이라 부르며 잘 따르던 지수. 지수를 위해 산이는 더 세심하게 원두를 볶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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