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

나의 모든 것을 너에게 줘도 아깝지 않다

by 한스푼

지혜와 지수는 같은 초, 중, 고등학교를 다녔다. 수줍음이 많던 지수에게 친한 친구가 생긴 건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다. 지수, 지혜, 혜숙이는 학교를 갈 때도 방과 후에 집으로 갈 때도 늘 함께였다. 지수와 지혜는 걸어서 3분 거리에 집이 위치해 있었고, 주말이면 성당에도 함께 다녔기에 둘은 단짝이 되었다.


지혜의 아버지는 택시 운전기사였다. 길에서 만날 때면 늘 용돈을 주시며 맛있는 것을 사 먹으라고 하셨다. 지수는 집이 가난해서 부모님께 용돈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지혜는 아빠께 받은 돈으로 떡볶이, 튀김, 어묵을 친구들에게 사주었다. 지수는 그 떡볶이가 그렇게 맛있었다. 시장에서 서서 먹는 분식은 사랑이었다.


집안 사정이 어려웠던 지수를 돕기 위해 지혜는 최대한 무심하게 넌지시 친절을 건넸다. 혹여나 지수의 마음이 상하지는 않을까 걱정을 했던 지혜였다. 하지만 지수는 이런 선의의 마음들을 고맙게 받아주었다. 지혜는 지수와 함께 있으면 편안했고, 언제나 내 편이 있는 것 같아 든든했다.


지수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누군가 이렇게 많이 베풀어준 사람은 지혜가 처음이자 마지막 사람이었다. 지혜는 마음이 따뜻하고 밝은 기운이 가득한 아이였다. 지수는 지혜와 함께 지내면서 성격도 점점 발랄해지고 지혜의 따뜻한 면모도 많이 닮아갔다. 춤을 좋아하는 지혜는 몸치인 지수에게 춤을 가르쳐주었다. 지수의 몸짓을 볼 때마다 지혜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지수는 몸치인 자신의 춤이 부끄러웠지만, 지혜의 웃는 모습이 좋아 더 열심히 춤을 추었다.


둘은 서로의 집에서 외박을 밥 먹듯이 했다. 서로 부모님도 잘 알고, 집도 가까워서 둘은 하루가 멀다 하고 같이 잠을 잤다. 밤잠이 없던 지혜는 지수와 밤새워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잠이 많은 지수는 밤 11시가 되기 전에 곯아떨어지기 일 수였다. 매번 흔들어 깨워도 꿈쩍도 안 하는 지수를 지혜는 포기했다. 지수집에 잘 때면 두 살 터울인 지수의 셋째 언니와 새벽까지 수다를 떨었다. 아침마다 지혜는 일찍 일어나는 지수의 큰소리와 발길질에 잠을 깨곤 했다.

"야! 박지혜! 일어나! 빨리 씻고 학교 가야지!"

"야! 김지수! 내가 성 붙이지 말랬지? 나 성 붙이는 거 싫다고 몇 번 말해!"

"아.. 미안미안. 깜빡했어. 빨리 일어나. 우리 늦었어."

둘은 티격태격 대며 고양이 세수를 하고 교복을 입고 집을 나섰다.


대학을 가면서 둘은 헤어졌고, 가끔씩 만나기는 했지만 지혜가 서울로 직장을 잡으면서 만남의 횟수는 뜸해졌다. 아주 가끔 만났지만, 어느샌가 둘은 서로의 연락처도 모른 채 늙어가고 있었다.






상철이도 지혜를 잘 알았다. 지수가 가장 친한 친구라며 상철이에게 지혜를 소개를 해 준 뒤로, 지혜를 만날 때면 항상 상철이가 동행을 했다. 지혜의 남차 친구가 생기면서 더블데이트도 종종 했다. 그리고 상철이 동생 현이의 서울 독립을 도와준 것도 지혜였다. 현이를 흔쾌히 품어 준 지혜에게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살다 보니 지혜와 연락이 점점 닿지 않았고, 이제는 지수의 장례식 초대장을 보내야 함에 상철이는 마음이 무거웠다.


지혜는 상철이에게 지수가 세상을 먼저 떠났다는 전화를 받았다. 너무나 갑작스러워 말문이 턱 막혀 아무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상철이의 설명을 듣고 알겠다고 말하고 이메일을 확인했다.


내 모든 것을 줘도 아깝지 않을 친구 지혜야

내가 너무 오랜만에 연락했지? 미안해.

너와 함께 한 내 어린 시절, 사춘기, 청춘들의 시간이
나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시간이었는지 몰라.

그때 난 너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을 받았고 배웠어.
우리 집이 가난할 때 넌 나에게 따뜻한 음식과 필요한 물건들, 이것저것들을 모두 챙겨줬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사랑으로 대하는 태도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나누어 주는 것들이 나에게 스며들었어.

어찌 보면 지금 내가 이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나누어 주는 것들의 시발점이 너로부터 온 거더라고.

지혜야. 내 인생의 전반부를 함께해 준 너에게 정말 고마워.
나의 인생이 풍부해진 건 모두 너의 덕분이야.

내가 바람이 되어 너의 곁에 머물며
너의 남은 삶들을 응원하고 지켜봐 줄게.

그리고 너에게 줄 유산이 있어.
이건 상철이와도 상의가 된 내용이야.
우리 시골집 옆에 너의 집을 하나 사두었어.
큰 집은 아니지만 나와 상철이가 너를 위해 만들었어.
그곳에서 나를 생각해 주라.
우리 어릴 때 함께 췄던 춤도 추고.

지혜야. 사랑해.
예전에도 지금도 나중에도




지혜는 장례식 전날까지 지수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추억했다. 서로 주고받았던 쪽지들도 꺼내보고, 함께 찍었던 필름 사진들과 빛바랜 스티커 사진들도 보며 꽃 같았던 젊은 날을 기억했다.


지혜는 지금 시니어 댄스 강사로 활동 중이다. 요즘에는 매일 지수와 함께 추었던 중학교 시절의 춤들을 열심히 연습 중이다. 지수를 떠나보내는 길을 예전처럼 재밌게 보내야지 다짐하며 오늘도 룰라의 엉덩이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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