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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밥상, 나의 책장, 아이의 세상

by 부만나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 나는 이미 그 아이를 위한 책장을 채우고 있었다. 아기자기한 촉감책부터 동화 전집까지, 아직 만나지 못한 아이를 위해 세상의 이야기들을 모으는 일이 행복했다. 아이의 방에 책이 먼저 들어찼고, 그 다음에 아이가 왔다.


"책은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야."


이것이 내가 자주 되뇌던 말이었다. 책을 통해 아이가 다양한 세계를 경험하고, 무한한 상상력을 키워가길 바랐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가 아이에게 책을 읽히려 했던 진짜 이유는 좀 더 복잡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 돌아가셔서 직접적인 기억은 없다. 대신 아버지가 들려주신 이야기를 통해 어머니를 만났다. "네 어머니는 항상 건강을 중요하게 생각하셨어." "어머니는 차가운 음식을 절대 먹이지 않으셨지." 아버지의 말씀 속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보곤 했다. 마치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책의 내용을 누군가에게 전해 듣는 것처럼.


아버지는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하실 때면 항상 그분의 원칙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음식에 관한 규칙이었다. "어머니는 냉장고에 들어갔던 음식은 아이에게 먹이지 않으셨어."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어머니에게 있어 음식은 곧 건강이었고, 모든 것은 신선하고 따듯해야 했다. 차가운 음식은 아이의 몸에 좋지 않다고 굳게 믿으셨다고 한다.


내가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어머니의 철학이었지만, 그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어머니가 음식을 통해 건강이라는 가치를 전하고자 했다면, 나는 책을 통해 지혜라는 가치를 전하고 싶었다. 두 가지 방식은 달랐지만, 그 뿌리에 있는 마음은 같았다 -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만을 주고 싶다는 간절함.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아버지가 전해주신 어머니의 신념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연장선에서, 아이에게 책을 읽히는 것이 '정신의 건강'을 위한 나만의 신념이 되었다. 어머니가 차가운 음식을 멀리했듯이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나는 무분별한 미디어와 스마트폰을 멀리했다. 어머니가 신선한 음식에 집착했듯, 나는 좋은 책에 집착했다. 그때는 이것이 얼마나 닮아있는지 알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첫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나의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그때의 나는 젊고 이상에 가득 찬 새내기 엄마였다. 아이가 태어나고 처음 집에 왔을 때, 나는 작은 그림책을 들고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겨우 며칠 된 신생아가 그 의미를 이해할 리 없었지만, 나는 그것이 우리의 첫 의식이길 바랐다. 세상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앞으로 너와 함께 수많은 이야기를 나눌 것이라는 약속.


처음에는 단순한 그림책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했다. 흑백 대비가 뚜렷한 카드와 동물 소리가 나는 책들.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책의 형형색색을 바라보았다. 조금 더 자라서는 내가 책을 읽을 때마다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어느 날, 아이는 책을 집어 들었다. 거꾸로였지만, 마치 읽는 척하는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웠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로 자라주고 있구나."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이 뿌듯했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했다. 내가 너무 나의 방식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머니가 냉장고 음식을 제한했던 것처럼, 나도 어떤 고집으로 아이를 제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책을 통해 아이에게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과 지혜를 전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생겨났다. 매일 밤 책을 읽어주지 않으면 불안했고, 아이가 책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실망했다. 좋은 의도로 시작된 일이 어느새 나와 아이 모두에게 부담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아이가 책장에서 책을 하나둘 꺼내 바닥에 던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귀여운 장난으로 보였지만, 점점 더 거세게 책을 던지더니 결국 책장 자체를 흔들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했다. 내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책들이 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이 견디기 힘들었다.


"안 돼! 책은 소중히 다뤄야지."


목소리를 높였고, 아이는 놀라서 울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나는 마치 어머니의 모습을 상상했다. 내가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 마시려 할 때 보였을지도 모르는 그 단호한 표정. 비록 직접 경험한 기억은 아니지만,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그려왔던 어머니의 모습이 내 안에서 되살아난 듯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상상 속의 어머니와 같은 모습으로 아이 앞에 서 있다는 사실에 깊은 혼란이 밀려왔다.


아이는 울음을 그친 후, 조심스럽게 바닥에 흩어진 책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내게 다가와 그 책을 내밀었다. 마치 "함께 읽자"는 제안처럼 보였다. 그 순간 깨달았다. 아이는 책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책과 다르게 상호작용하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내가 정해놓은 '옳은 방식'이 아닌, 아이만의 방식으로.


그날 밤, 아이를 재운 후 나는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에게서 들은 어머니의 규칙들, 그리고 내가 만든 규칙들. 우리는 모두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아이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 사랑이 때로는 고집이 되고, 그 고집이 벽이 되기도 한다. 어머니는 건강을 위해 냉장고 음식을 피했고, 나는 좋은 독서 습관을 위해 책을 강조했다. 형태는 달랐지만, 본질은 같았다.


지금 첫째 아이를 보면, 그때의 나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낀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란 아이.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 역시 많은 것을 배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처음의 엄격함이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책을 통해 아이가 넓은 세상을 보길 원했지만, 정작 나 자신은 좁은 틀 안에 갇혀 있었다는 것을. 내가 꿈꾸던 '책을 통해 세상을 보는 아이'는 단순히 책을 좋아하는 아이가 아니라, 자유롭게 상상하고 탐험하는 아이였을 텐데.


오랜 시간이 지나 돌이켜보니, 육아의 여정은 끊임없는 배움의 과정이었다. 특히 내가 직접 알지 못했던 어머니의 양육 철학을 아버지의 이야기로만 접하고, 그것을 나름대로 재해석하여 내 아이들에게 적용해온 방식이 때로는 경직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이 자라면서, 그리고 내가 부모로서 성숙해가면서, 그 경직됨은 점차 유연함으로 바뀌어갔다.


다음 날부터, 나는 달라진 접근법을 시도했다. 책 읽기를 강요하는 대신, 책이 아이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환경을 만들었다. 아이가 원할 때만 책을 읽어주었고, 때로는 책 속 이야기를 연극처럼 표현하기도 했다. 책은 더 이상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즐기는 것'이 되었다.


놀랍게도, 이렇게 자유로운 접근법이 오히려 아이들이 책에 더 깊게 빠져들게 했다. 강요가 아닌 즐거움에서 비롯된 호기심이 그들의 상상력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어머니도, 만약 조금 더 오래 살아계셨다면, 냉장고 음식에 대한 규칙도 조금씩 완화했을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처럼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규칙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사랑의 의도임을.








어머니의 '냉장고 음식' 철학과 나의 '책 읽기' 철학은 근본적으로 같은 곳에서 출발했다. 아이를 더 건강하게, 더 지혜롭게 키우고 싶은 마음. 하지만 우리가 잊고 있었던 것은, 어쩌면 아이 자신이 그 길을 찾아갈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다른 마음가짐으로 책을 대한다. 책을 통해 아이가 자라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나도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가 식탁에 올린 신선한 음식처럼, 나는 아이에게 이야기를 대접한다. 그리고 아이는 때때로 그 이야기를 거부할 권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어머니와 나, 우리는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아이를 사랑했다. 비록 나는 어머니의 양육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지만,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그 사랑의 본질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차이 속에서 나는 중요한 공통점을 발견했다. 우리 모두 아이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발견하길 원했다는 것. 어머니는 건강한 몸으로, 나는 풍부한 이야기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아이 스스로 그 방식을 찾아가도록 지켜보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


이제 내 아이들도 모두 성장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경험하고, 이해한다. 책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의 세계는 결국 그들 자신의 인생 이야기가 되어 펼쳐지고 있다.


"엄마의 밥상, 나의 책장, 아이의 세상"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른 듯하지만 같은 곳을 향한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다음 세대에게 세상을 전한다. 어머니는 건강한 음식으로, 나는 책으로, 그리고 내 아이들은 또 그들만의 방식으로. 그 과정에서 '부모로 만나는 나'는 계속해서 새로운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마치 우리가 함께 읽은 수많은 책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이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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