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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샘 Sep 27. 2024

귀뚜라미에게 보내는 시

흰샘의 한시 이야기


蟋蟀次韻 실솔차운    귀뚜라미 소리에 차운하다 

                             -장유-


繞屋多衰草 요옥다쇠초    집을 둘러 더부룩이  시든 풀숲에 

終宵蟋蟀聲 종소실솔성    밤을 새워 울어대는 귀뚜리 소리

天機眞動聽 천기진동청    듣노라니 참된 천기  울렁거리고

時物轉關情 시물전관정    계절 아는 저 벌레에 마음  얽히네

浙浙霜威逼 석석상위핍    서걱서걱 서릿발 돋는 서슬에

看看月魄盈 간간월백영    무장무장 달빛은 차오르는데

客牕偏側耳 객창편측이    객창에서 귀 기울여 듣는 사이에

愁坐到天明 수좌도천명    우두커니 시름 겨운  새벽을 맞네

[번역, 해설: 흰샘]


낯선 땅 여관에서 하룻밤 묵는다. 때는 가을이 깊어 집 주변에 우북하던 풀도 다 시들었다. 그 풀숲에서 밤새도록 귀뚜라미가 운다. 

그 소리 속에서 시인은 계절의 흐름을 발견하고, 진정한  천기(꾸밈없는 천부의 性情)를 깨닫는다. 그래. 진리가 별다른 것이겠는가. 때가 되면 귀뚜라미가 우는 것, 제 철을 알고 제 분수를 아는 것, 그런 게 진리인 게지. 

가을밤은 깊어만 간다.  서릿발이 돋는 듯 서걱이는 소리도, 천지를 가득 채운 하얀 달빛도 모두 귀뚜라미 소리 때문인 것만 같다. 

그러는 사이에 희부옇게 날이 밝아온다. 우두커니 앉은 채로 시름 겨운 새벽을 맞는다. 


조선 중기 문신이자 문장가인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의 작품이다. 

내 생각에 이 시의 묘처는 아무래도 제목에 있다. 귀뚜라미 소리에 차운을 하다니!! 차운이란 남의 시의 운자(韻字)만 빌려다가 쓰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시인은 밤새 읊조리는 귀뚜라미의 시를 듣고 그 시에 위와 같이 답한 것이다. 나희덕의 시를 안치환이 노래로 만들어 부른 귀뚜라미를 흥얼거려 본다. 유난히 힘들게 찾아온 가을이다.

귀뚜라미_'한겨레신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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