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샘의 한시 이야기
[번역, 해설: 흰샘]
낯선 땅 여관에서 하룻밤 묵는다. 때는 가을이 깊어 집 주변에 우북하던 풀도 다 시들었다. 그 풀숲에서 밤새도록 귀뚜라미가 운다.
그 소리 속에서 시인은 계절의 흐름을 발견하고, 진정한 천기(꾸밈없는 천부의 性情)를 깨닫는다. 그래. 진리가 별다른 것이겠는가. 때가 되면 귀뚜라미가 우는 것, 제 철을 알고 제 분수를 아는 것, 그런 게 진리인 게지.
가을밤은 깊어만 간다. 서릿발이 돋는 듯 서걱이는 소리도, 천지를 가득 채운 하얀 달빛도 모두 귀뚜라미 소리 때문인 것만 같다.
그러는 사이에 희부옇게 날이 밝아온다. 우두커니 앉은 채로 시름 겨운 새벽을 맞는다.
조선 중기 문신이자 문장가인 계곡(谿谷) 장유(張維, 1587~1638)의 작품이다.
내 생각에 이 시의 묘처는 아무래도 제목에 있다. 귀뚜라미 소리에 차운을 하다니!! 차운이란 남의 시의 운자(韻字)만 빌려다가 쓰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시인은 밤새 읊조리는 귀뚜라미의 시를 듣고 그 시에 위와 같이 답한 것이다. 나희덕의 시를 안치환이 노래로 만들어 부른 귀뚜라미를 흥얼거려 본다. 유난히 힘들게 찾아온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