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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샘 Jul 22. 2023

어느 늙은 느티나무의 죽음

아파트 102동 지하주차장 입구에

묵묵히 서 있던 느티나무가 죽었다.

한밤중 소리 없는 부음訃音에 102동에 사는 

나무들은 빈소도 없는 주검 주변에 모여들었다.

일찌감치 꽃을 피웠다가 열매도 없이

잎만 무성한 야리디야린 개나리나무는 구석에 앉아

찔찔 짜고만 있었다.

평소에도 좀 도도하고 사치하기도 했던 목련나무는

올여름 더위를 걱정하며 하릴없이 커다란 잎으로 

부채질만 하고 있었다.

시커먼 피부의 살구나무는 느릿느릿 익어가는 살구가

행여 다칠세라 조심스레 말을 아꼈다.

그래도 발 벗고 나선 것은 느티나무 곁에 서 있던 감나무였다.

사실 작년부터 조금씩 그르렁거리는 느티나무의 숨소리 때문에

밤잠을 설친다고 짜증을 내던 터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르렁거리던 숨소리가 잦아들더니 그만 

고요해지더라는 것이었다.

느티나무의 숨이 멎는 순간 감나무는

누렇게 시든 잎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것을

어둠 속에서도 분명히 보았다고 했다.

느티나무 옆에서 유일하게 임종臨終을 한 감나무의 

잠긴 목소리를 들으며 나무들은 일제히 몸을 흔들었으며

아닌 밤중에 102동은 느닷없는 회오리바람이 한 차례 지나갔다. 

아침이 되자 아파트 관리소에서 사람들이 나왔다.

전기톱이 위잉위잉 돌아가고 늙은 느티나무

몸에서는 그 동안 쌓아두었던 세월의 편린들이

무수히 쏟아져나와 노랗게 쌓여갔으며

분노와 두려움에 떨며 나무들은 숨을 죽이고 흐느꼈다.

유세차, 양기陽氣가 최고조로 충천한, 신축년 하짓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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