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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샘 Aug 07. 2023

흰샘의 漢詩 이야기_연못가에서 싹튼 사랑

采蓮曲(채련곡) 연밥 따는 노래     


秋淨長湖碧玉流(추정장호벽옥류) 맑은 가을 긴 호수에 옥 같은 물 흐르는데 

荷花深處繫蘭舟(하화심처계란주) 연꽃 핀 못 깊은 곳에 목란주 매 놓았네.

逢郞隔水投蓮子(봉랑격수투연자) 임 만나려 물 저편에 연밥을 던지다가

剛被人知半日羞(강피인지반일수) 남에게 알려질까 한나절 수줍었네. 

[번역: 흰샘]     


초가을은 연꽃이 지면서 연밥이 익는 시절이다. 경포호 긴 호수는 가을이라 더욱 맑아 물빛도 벽옥 같다. 길쭉하고 날씬한 목란배를 탄 아가씨들이 연꽃과 연밥이 어우러진 호수 사이를 누비며 연밥을 딴다. 연밥만 따러 나왔겠는가? 물 건너편에는 은밀히 만나기로 약속한 사내가 있다. 하지만 호수는 넓고, 연잎은 길고 우거져 가끔 목란배가 지날 때 연잎이 흔들릴 뿐이다. 게다가 목란배가 어디 하나둘이어야지. 물 건너 사내는 애가 탄다. 그때 연밥 몇 개가 연못에서 날아온다. “나, 여기 있어요.” 하지만 그 연밥을 사내만 보았겠는가? 볼 사람은 다 보았겠지. 그 사실을 깨닫고는 아가씨는 부끄러워 연못에서 나올 수가 없다.     

뭐, 그런 내용이다.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의 작품이다. 강릉 경포호는 예로부터 연꽃의 명소였나 보다. 난설헌의 집은 바로 경포호 옆에 있다. 양반댁 규수가 연밥을 따러 갔을 리 없다. 그저 그녀는 멀찍이서 그런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다만 바라보기만 했을까? 그녀는 분명 그런 사랑을 꿈꾸었을 것이다. 길지 않은 스물일곱 평생에 불행하고 가슴 아픈 일이 너무도 많았던 그녀에게 사랑은, 행복은 그런 것이었을 터이다.

난설헌 동상은 없는 게 나을 뻔했다...

이 시는 난설헌의 동생인 허균이 자신의 시화집 <학산초담>에 누이의 삶과 함께 소개한 작품 가운데 들어있다.(말구의 ‘剛’은 ‘遙’나 ‘恐’으로 되어 있는 것도 있으나 허균의 글이 가장 신빙성이 높다고 판단되어 ‘剛’으로 한다. 여기서 ‘剛’은 ‘다만’이라는 뜻을 가진 부사로 쓰였다.) 본래 ‘채련곡’은 악부(樂府)의 곡명 가운데 하나였다. 오래된 주제이다. 대체로 시적 화자는 여성이며, 사랑을 노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연못은 뽕밭과 더불어 옛날 옛적 로맨스의 장소였다. 여인들의 바깥출입이 제한되었던 시절이지만, 연밥을 따거나 뽕잎을 따는 것은 여인의 일인지라 그들은 연못과 뽕밭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눈 맞는 사내가 어찌 없겠는가? (어쩌면 호시탐탐 뽕밭과 연못가를 어슬렁거리는 놈팽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거기서 로맨스가 이루어졌다. 예전에 야시시한 영화 ‘뽕’ 시리즈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뽕밭에 비하면 연못은 좀 더 낭만적이고 시적인 데가 있다.

연자(蓮子)는 바로 연자(戀子)이다.

이 시에서 시안(詩眼)은 단연 ‘연자(蓮子)’이다. 연밥이라는 뜻이지만, ‘그대를 사랑합니다’라는 뜻을 가진 ‘戀子(연자)’와 발음이 같다. 그래서 중의법으로 쓰인 것이다. 난설헌의 시재(詩才)가 빛을 발하는 곳이다.

어쩌다 해마다 여름이면 강릉에 가게 되고 그러면 반드시 들르는 곳이 바로 경포호이다. 연꽃이 절정을 이루는 경포호 바로 곁에 허균과 허난설헌이 태어나 자랐던 생가가 있다. 지금은 공원으로 가꾸었지만, 예전에는 그냥 옛날 집만 있었다. 오래전부터 그곳에 드나들었는데, 조금은 조악한 동상이나 조형물이 들어선 지금보다 옛날이 오히려 낫다는 생각이 든다. 한 번쯤 가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허균과 난설헌 남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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