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발견
평생을 궁금해하던
나 사용 방법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중이다.
사주를 파악하고 싶은 마음도 그 일부의 욕구였나 보다.
나의 사주 구성은 물과 불, 금의 공존 식상혼재
깊이 침잠하고 뜨겁게 타버리고
냉정하게 잘라내는 나라는 인간은..
당최 이해를 하기도 종잡을 수도 없는
변덕종합세트의 프레임으로
이방인처럼 삶을 맴돌며
이해받지 못한 외로움을 앓는다.
자칫하면 깊이 빠져버리고 여차하면 타버리는...
열정과 소진의 삶이라니..
물과 불 사이의 방황에 정체성을 잃고
양극에서 부딪히는 충격의 아픔을
감각하나하나에 문신처럼 새긴 채
금의 언어로 칼날 같이 말하는 인성이 좋지 않은 내가..
나를 해소하여 누군가의 깊은 위로가 되며
성장하는 기막힌 반전이 숙명이라고 이야기한다.
시간이 멈춘 듯 빠져들어 고민한다.
답을 찾아 헤매던 모든 삶의 과정이
패턴처럼 반복되어 이어진 것을 깨닫고 나니 보이기 시작한다.
인간이기에 함께를 갈망했지만
같은 부류의 사람을 만날 기회도
켄타우로스 같은 스승도 없었기에
나는 무엇인지의 고통을 씹으며
나는 왜?를 소크라테스처럼 고민했다.
철학 서적에나 있는 한 줄 삶의 정의를
수십 년 경험에 담아 날것의 야생이 되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내적 갈등의 이유를 발견하고 나니, 살아있는 정의가 흘러든다.
싦은 남루하고 고된 것이라는 이금희 아나운서의 말..
피하고 싶은 고통? 그래, 그냥 겪는다.
그 정의에 공감한다면 당연한 것이니까!
산 넘어 산이라고
정의 하나를 벋아들이고 나니 새로운 숙제가 기다린다.
기쁜 것도, 즐거운 것도 크게 동요가 없는 나를 보며 육신이 지쳤는지? 마음이 우울한 것인지
걱정이 담기던 찰나,
진짜로 대운이 들었는지, 하늘의 도움인지, 노력의 댓가인지, 이해의 총량인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적절한 키워드 검색의 기적 덕분에 분간의 정의를 만난다.
평정심은 지켜보는 나가 깨어있는 움직임의 상태
우울감은 움직이고 싶은 나가 사라진 멈춤의 상태
아마도 지금 나는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평생 숙제의 끝 같은 평정심과 적당히 지침이라는 상태 가 섞여 있지 않을까??
억울하지도 즐겁지도 않음을
덤덤히 맞이하고 묵묵히 겪으니 말이다.
외로움너머, 고독 너머, 고요 너머, 평정심까지
그리 바라던 중도의 삶이란 지침을 끓어 안고서
외부의 상태가 아닌,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내부의 균형을 안에서 찾아 사용해야 하는 것이었나 보다.
평정 너머에 있는 본질을 파악하고 사용 가능한 그날엔
아마도 공중 부양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