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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Feb 10. 2022

겨울04-불타오르네

불타오르네


불타오르네     

  큰이모가 돌아가시고 나와서 연례행사처럼 방학이면 한 번씩 큰이모부 댁에 들리곤 한다. 평소와 다름없이 식사하고 담소를 나누다 돌아오던 길. 근처 시장에서 잠깐 무언가를 사 온다고 들렸다가 금요일 퇴근길 도로에 발목이 잡혔다.     


“어, 벌써 차 막히기 시작하네.”

“왜, 졸려?”

“아뇨, 이따 8시에 온라인 모임 있는데… 에이, 설마 그 전엔 가겠죠.”

“그래, 천천히 조심히 운전해.”


  내비게이션은 종종 다른 길을 안내하지만, 집까지 도착 시간은 줄어들지 않는다. 해가 떨어지고 앞에 줄지어 선 차들의 브레이크 등이 눈이 부시도록 붉게 타오른다. 내 맘도 타들어간다. 서울에서 용인 오는 길이 아무리 오래 걸려도 보통 2시간이면 충분하다. 온라인 모임이 있어 넉넉잡아 3시간 이상 여유를 두고 출발했는데 하필 금요일 퇴근길이다 보니 정말 10분 동안 100미터도 채 움직이지 못한 것 같다.     


“와, 깜깜해졌네요.”

“도대체 여기가 어디라니?”

“그러게요. 차 막혀서 내비가 시키는 대로 왔더니 영 새로운 골목이네. 어딘지도 모르겠어요.”

“너 모임 있다는 건 괜찮아?”

“아니 다른 날이면 상관없는데, 내가 주관하는 모임을 시작하는 날이거든요. 모임을 열기로 한 사람이 없는 거잖아.”

“늦는다고 메시지라도 미리 보내. 아직도 서울인데 8시 전에 못 가.”     


  저녁 7시 30분 경. 어딘지 모를 서울 한구석, 엄마와 나는 차 안에 갇혀있었다. 길이 많이 막히니 내비게이션이 자꾸 새로운 길을 안내한다. 그걸 따라가다 보니 여기가 어딘가 싶다. ‘교통상황이 바뀌어 경로를 다시 설정합니다.’라는 안내 메시지가 무서울 지경...--; 온라인으로 그림 모임을 시작하기로 한 날인데, 난 왜 아직 길거리에 있는 걸까… 다른 날 늦는 건 상관없는데 내가 주최하는 모임을 시작하는 날 늦어 버린 것. ‘어떡하지, 어떡하지’를 반복하다가 신호에 걸렸을 때 톡방에 사과 메시지를 올린다.    

 

 ‘선생님들 죄송합니다. 제가 서울에서 내려가고 있는데 차가 안 움직여요. ㅜㅜ 먼저 그림 시작하고 계시면 도착하는 대로 오픈하고 인사할게요. 각자 그림을 그리기로 한 시간이니까 일단 자기 그림을 그려보도록 하죠. 첫날인데 정말 죄송해요.’     


  휴대폰의 음성-텍스트 변환 기술에 감사한 순간이었다. 아무리 신호대기 중이라지만 문자를 쓰는 건 힘드니까. 조금 어색하기는 해도, 천천히 말을 하면 찰떡같이 알아듣고 텍스트를 써주니 일단 지연 메시지를 보내둔다. 마음씨 착한 선생님들은 ‘괜찮다,’ ‘운전 조심해라,’ ‘그림 잘 그리고 있다’며 위로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신호에 설 때마다 사과 메시지를 보내니 선생님들도 안타까우셨는지 그 중 한 분이 대신 온라인 회의를 오픈해주신단다. 

  아, 이런 천사….. ㅜㅜ     


“엄마, 좀 이따가 차 세울 곳 있으면 잠깐 모임에 인사 좀 하고 갈께요. 이러다가 끝날 때까지 못 들어가겠어요.”

“그래. 마음 불편해서 어쩌니. 너 편한대로 해.”     


  마침 휴게소가 보여 얼른 주차를 하고, 휴대폰으로 온라인 회의실에 접속했다.  

   

“선생님들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분명히 날 밝을 때 서울에서 출발했는데 아직도 집에 도착을 못하고 있네요. 그림 잘 그리고 계시죠?”

“안녕하세요~”

“어떻게 운전 중에 접속을 하셨어요.”

“운전 조심하세요~”     


  다들 걱정 말라며, 각자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해주신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 이리 따뜻할 수가 없다.     

“와,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정신이 없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 거의 다 와 가니까 그림마저 그리고 계시면 저 집에 들어가서 마무리 인사할게요.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8시에 시작하기로 한 모임인데, 9시 반이 되어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서둘러 회의에 접속해서 선생님들 얼굴 보고, 각자 그린 그림 공유하고 또다시 사과와 감사의 인사로 마무리.     


“끝났어?”

“네.”

“차 막히는데 서울 갔다 오느라 고생했네. 다른 날 갈 걸 그랬나보다.”

“아니예요, 우리 일찍 출발했잖아요. 내가 괜히 시장가자고 해서… 누가 이렇게 막힐 줄 알았나. 모임도 다른 날이면 늦을 수도 있지 하겠는데 하필 첫날이라… 마무리 잘 했으니 걱정 마세요.”     


  온라인 모임에 늦은 게 엄마 탓도 아닌데, 운전하는 내내, 집에 와서까지 미안해하는 엄마에게 괜히 더 죄송해진다. 이 시간에는 그리지 못했지만 주최자 없이 모임을 시작한 선생님들께, 또 옆에서 조바심내며 애타는 시간을 함께 한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을 담아 침대맡에서 나도 그림 한 장 끄적여본다. 


*그림이야기: 평소 그림그릴 때 쓰지 않던 펜으로 스케치를 하고 채색을 했더니 선이 다 번지는 사태 발생. 게다가 종이 재질도 익숙하지 않은 새 드로잉북의 첫장이라 물감이 원하는대로 칠해지지도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림 느낌은 괜찮게 나왔지만, 그리는 내내 당황, 또 당황. 이날은 모임시작부터 잠자리 그림까지 종일 '당황'의 연속이었다. 새로운 도구를 사용할 때는 본격적인 작업 시작 전 테스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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