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는 전혀 다르지만 똑 닮은 엄마
꿈인지 생시인지 볼을 꼬집어 보았다. 아팠다.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한국에 도착한 것이다. 삼 년 만에 엄마를 만났다. 나와 나의 가족들을 반기는 엄마의 밝은 얼굴에 나는 눈시울이 흐려진다. 엄마는 나를 무척 사랑한다. 엄마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서 변함없이 나와 오빠를 사랑한다. 안타깝게도 많은 부분이 내가 원하는 방식은 아니었다. 나도 내가 받은 엄마의 사랑처럼 나만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사랑한다. 알고 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어쩜 나만의 사랑 방정식이 아이들을 완전히 채워주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대물림되는 것은 외모나 식성만이 아니다. 나는 내가 좋아했던 엄마의 눈빛과 또 내가 싫어했던 엄마의 얼굴을 하고 내 아이를 바라본다. 엄마는 내 기억 속의 외할머니와 똑 닮은 눈빛과 얼굴을 하고 나의 아이들을 바라본다. 때론 화를 내기도 하고 때론 활짝 웃기도 한다.
코비드 때문에 호주 국경이 닫히기 전엔 일 년에 한 번씩은 엄마를 만났던 것 같다. 내가 한국에 오거나 때론 엄마가 나를 만나러 호주에 오거나 아니면 중간 지점인 제3 국에서 만나거나...
엄마는 오빠의 아이 셋을 키웠다. 엄마는 “그때는 내가 젊어서 볼 수 있었어”라고 자주 말하곤 한다. 하지만 단지 오빠를 사랑했던 것뿐이다. 한국에 올 때마다 목격했던 엄마의 황혼 육아기를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그 시절의 엄마 그러니까 그녀의 하루는 해가 뜨기 전에 시작되었다. 7시 15분에 집에서 나서야 하는 며느리가 출근길에 간단히 먹을 수 있을 요기거리와 커피를 만든다. 뒤이어 출근하는 아들을 위해 매일 아침 새로 한 따뜻한 밥과 국을 준비한다. 간혹 새벽녘에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는 9개월 된 막내 손자가 곤히 잠들어 있는 아들 내외와 제 형과 누나를 깨울까 봐 잠도 편히 들지 못한다. 깜깜한 새벽에도 막내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오뚝이처럼 일어난다. 아들 가족이 자고 있는 방으로 빛의 속도로 달려가 울고 있는 손자를 포대기에 둘러업는다. 큼지막한 천에 붙은 두 개의 끈이 달린 물체 = 포대기로 그녀가 만들어낼 수 있는 기적은 무궁무진하다.
아들 내외를 출근시키고는 미운 세 살의 역할을 톡톡히 해 내고 있는 둘째를 어르고 달래 밥을 먹이고 어린이집 등원 준비를 마친다. 한 손으로는 손녀의 손을 잡고 또 한 손으로는 손잡이가 달린 자전거에 탄 손주를 민다. 그리고 포대기엔 막내 손주를 업은 채로 손자와 손녀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킨다. 두 손과 등짝을 이용한 황혼육아! 진정 대단한 능력이다.
이제 사람을 알아보기 시작한 9개월 된 손자는 포대기와 그녀의 등과 한 몸이 되려는지 한 치도 떨어지지 않으려 앙탈을 부리다가 등 뒤에서 지쳐 잠이 든다. 지금이다. 그녀가 메마르고 거친 입속에 밥을 밀어 넣을 수 있는 시간. 온 가족이 흔적을 남기고 간 아침 밥상에 앉아 밥 한 술을 뜬다. 그리고 본인의 손이 다 가야 직성이 풀리는 그 큰 살림을 또다시 시작한다. 손자를 등에 업고선 말이다. 포대기는 그녀의 세상에서는 작업 도구이며 교복이다.
“긴 병에 효자는 없다더니 “ 유별나다 못해 미련스럽기까지 한 그녀의 자식 사랑도 시간과 함께 서서히 퇴색되어간다. 살림에 지친 건지, 육아에 지친 건지, 엄마 노릇에 지친 건지, 아니면 사는 것에 지친 건지, 엄마를 만날 때마다 그녀의 지친 얼굴을 마주칠 때면 나는 목이 메었다.
시간이 흘렀고 오빠의 삼 남매는 무럭무럭 자랐다. 홀로 울고 웃으며 사랑했던 오빠의 세 아이를 키워내 준 엄마는 그 집에 덩그러니 홀로 남았다. 그리고 이젠 외갓집으로 한국어 어학연수를 온 딸내미의 아이들을 돌봐줄 기력이 없다. 기력도 없지만 돌봐주고 싶지도 않다. 엄마의 그런 심경의 변화를 지지한다.
내가 한국에 살고 있었다면 엄마의 변한 마음을 지지할 수 있었을까? “이번엔 내 차례인데” 하며 서운하게 생각했을게 분명하다. 내가 싸가지가 없어서가 아니다. 한국에 살면서 항상 곁에 있었다면 엄마의 소중함을 미처 깨닫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코로나 덕분에 엄마를 삼 년 만에 만났다. 한국에 살지 않아서 내가 이해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게 된 것들은 하나 둘이 아니다. 어느새 중년이라 불려지는 나이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철딱서니가 없다. 하지만 어떤 모습의 엄마도 지지하고 이해할 준비가 되어있는 충성스러운 딸년은 가까스로 된 것 같다. 다행스럽게도...
엄마는 부잣집 딸이었는데 나는 부잣집 딸이 아니다. 살면서 엄마에게 위기가 온 적은 있지만 돈이 마른 적은 없었다. 엄마의 그늘을 벗어난 이후로, 나는 돈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쉬는 날도 없이 뛰어다녔지만 나는 항상 돈이 생기기기 무섭게 집세를 내고 생필품을 사고 돈과의 힘겨루기를 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돈 한 푼 없이 남편과 아이들 둘과 함께 엄마에 집에 나타나서 엄마의 눈치를 본다.
엄마의 안락한 집안에서 손을 씻을 때 이를 닦을 때 아이들이 목욕을 할 때 물이 바닥에 튈까 봐, 거울에 자국을 남길까 봐 조심한다. 자꾸만 빠지는 나의 긴 머리카락이 엄마의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을 오염시킬까 봐 욕실 바닥의 수체 구멍을 막을까 봐 머리카락 주의보를 발동시킨다.
아이들은 안정과 편안함을 선사하는 할머니 집에 머무르는 것이 싫지만은 않은 것 같다. 기억을 되돌려본다. 어릴 적 삶의 위기에 몰렸던 엄마와 외할머니 집에 살았던 적이 있었다. 외갓집에 살던 어릴 적 내가 그랬듯이 내 아이들도 외할머니의 눈치를 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빠도 새언니와 세 아이들과 엄마의 집에서 사는 동안 엄마만의 자식사랑이나 생활방식이 버겁지 않았을까?
언젠가 친정 부모님께 육아 도움을 받았던 워킹맘 친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녀의 시부모님은 심리적으로 자식들과 건강한 거리를 유지하시는 편이고, 멀리 사셔서 명절 때만 만난다. 친구는 아이가 어릴 때 한동안 시부모님과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친정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엄마 아빠에게 정말 감사해. 하지만 같이 살지 않았으면 전혀 몰랐을 텐데. 시시콜콜한 내 가족... 나만의 치부를 남편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다 들켜버린 것만 같아 힘들 때도 있었어.”
오빠의 가족이 떠난 후 혼자만의 생활에 익숙해진 엄마는 내 아이들의 난리 부르스가 벅차다. 나는 내 아이들의 난리 부르스가 익숙하지만 엄청나게 힘겹다. 남자 어린이 둘이 벅차고 힘겨운 두 여자가 서로를 의지하기 시작한다. 가재는 게 편이고, 나는 그녀의 딸이며, 그녀는 나의 엄마이다.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엄마만의 생활 방식과 잔소리가 짠하다. 세월이 흘러도 토시 하나도 변하지 않은 그녀의 경이로운 일관성에 기립박수를 보낸다. 어릴 적 들어 눕고 투정 부릴 사람이 이 세상에 엄마 단 한명이었것처럼, 엄마도 마음속에 모든 것을 아무런 필터 없이 말하고 속내를 터 놓으며 짜증을 부려도 뒤탈이 없는 만만한 딸년이 곁에 있는 게 싫지만은 않을 것 같다. 같이 살지 않으면 절대 모를 외할머니와 엄마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은 내 아이들의 세상에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 한국에 살고 있지 않아서 엄마를 자주 만나지 못하는 나는 알고 있다. 오순도순과 티격태격은 고운 정과 미운 정을 창조하고, 서로 사랑하고 성내고 울고 웃는 그 모든 시간들은 보석처럼 소중하단 것을 말이다. 게다가 엄마와 나의 푸닥거리를 주워듣게 될 내 새끼들의 한국어 능력 신장은 덤이 아니던가? 엄마의 활약을 기대해본다. 할머니의 구성진 사투리를 전수받는 것도 꽤 힙한 한국어 어학연수의 하이라이트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