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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우주인 Jul 27. 2022

한국어 어학연수 프로젝트


외국에서 산다. 외국인 남편과 한 이불을 덮고 잔다. 외국인들 사이에서 부대끼며 직장생활을 한다. 나의 반쪽 영어와 똑 닮은 반쪽짜리 한국말을 하는 반은 한국인, 반은 외국인 남자아이 둘을 키우고 있다. 언젠가부터 첫째의 한국말은 점점 녹슬어가고 있고, 둘째의 한국어 구사 능력과 이해력은 낳고 키워준 엄마가 한국사람이라고 하기엔 꽤나 부끄럽다. 둘째는 내가 하는 한국말을 자주 알아듣지 못한다. 아이는 가끔 외계어 같은 한국말을 읊어대다가 엄마가  알아듣지 못할 때마다 드러누워 운다. 나는 우는 아이에게 그저 짜증만 쌓여간다.


'아들아~~ 나도 니 옆에 함께 드러누워서 울고 싶다. '


한국에 사는 한국 엄마들이 아이들의 영어교육 때문에 울고 웃듯이, 외국에서 사는 한국 엄마들은 아이들의 한국어 교육 때문에 울고 웃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자책을 시작해본다. 효과적으로 자책하기 위해서 기억을 되돌려본다. 첫째를 임신하고 나서부터는 전업주부로 지냈다. 둘째를 낳고 둘째가 두 돌이 막 지났을 때부터 직장으로 복귀했다. 그때부터다.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내 적성에 맞는 일은 아이들 간수하는 데에 지장을 주지 않으며 입금이 되는 일로 변했다. 먹고살기 위해 직장에 다닌다. 주마다 렌트비와 아이들 교육비를 내고 은행 융자금을 갚는다. 친구를 만나고 쇼핑과 취미활동도 즐긴다. 무엇을 하든 돈이 필요하다. 지난 3년 동안 은행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똥 줄이 타도록 밥벌이에 전념했다. 워킹맘이 된 후부터 퇴근 시간이 되면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는 법, 집에 갈 때 가족들을 위해 콧노래를 사가는 법을 터득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밥을 짓고 청소를 한다. 일주일에 3~4일은 출근을 했다. 이 세상 모든 일을 나 혼자만 해내는 것 같아서 온 가족에게 짜증을 무한 전파했다. 짜증은 내가 사는 힘!


아니다. 모두 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거짓말은 금물이다.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을 뿐이니 이실직고 고백한다.


뼛속까지 한국 사람인 나는 내가 살고 있는 나라인 호주의 느림 문화에 올바르게 적응되지 못했다. 영혼까지 갈아 넣어 열심히 일하고 번아웃에 빠지는 것이 내가 보유한 한국인 유전자이다.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는 다채로운 문화의 이민국에서 열심히 일하는 일개미로 살다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일을 나 혼자 해내는 것 같은 억울 불치병에 걸린다. 일개미 억울녀가 되고 싶지 않아서 적당히 사는 법을 어렵게 터득했다. 하지만 적당히 일해도 직장에서 과하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으로 평가받고, 노동력 착취의 첫 번째 타깃이 된다. 덕분에 다른 지병이 생겼다. 일개미 유전자를 거스르고 열심히 일하지 않으니 내가 가진 지병은 번아웃이 아닌 무기력증이다.


나는 퇴근  집에 도착하여 기본적인 집안일을 끝마치면 무기력 블랙홀에 빠져 지낸다. 강력한 무기력 블랙홀 근처에 가족들은 접근하지 못한다. 심지어 나는 남들만큼 게으르고  남들보다 조금  못났다. 그리고  못남을 완벽히 완성하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 게으름뱅이 못난이 엄마의 활약으로 아이들의 한국어는 나날이 초라해진다.


지금이다.  탓을 시작을 시작할 순간이다.


“넌 너무 말이 많아”


모국어인 영어를 참 잘하는 외국인 남편은 말이 너무 많다. 다정하다. 다정한 소통의 황제 아빠 덕분에 아이들의 영어 능력은 또래 아이들보다 높다. 소통 황제인 외국인 아빠의 활약으로 나와 아이들과의 한국어 소통은 점점 줄어든다. 드디어 엄마표 불통 블랙홀도 하나 더 추가! 불통 블랙홀 덕에 무기력 블랙홀도 곱빼기가 되어가고 있다.


“감사합니다. 아빠 육아 재능자 외국인. 나도 너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내 나라 말도 제대로 알려주지 못한 구제불능 엄마는 아녔을 텐데... “


하며 만만한 남편 탓을 해본다. 남 탓은 자책에서 나를 건져내 주는 새로운 비상상비약이다. 아이들과 한국말로 소통하지 못했던 지난 시간을 잡을 수도 없지만 나 자신의 느슨함을 제대로 자책하는 것에도 실패했다.


뚝배기 안에서 보글보글 끓는 찌개를 숟가락으로 떠서 입안에 넣을 때.


“아 시원하다.”


라고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내 아이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뜨거운 목욕탕에 탕 속에 들어가 앉아


“아 시원하다”


라고 말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내 아이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어떻게 알려준다는 말인가? 아이들이 알아주길 바라기 전에 뚝배기에 찌개를 끓이고 목욕탕 탕 안에 아이들을 들여보내야 한다. 하지만 난 일관성 있게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채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잘 되기를 바라기만 한다.


내가 사는 세상에서 망하지 않으려고 무기력 블랙홀 속에서 최선을 다해 적당히 살았는데, 나의 살과 피로 만들어져 세상에 나온 내 아이들과 한국어로 소통하는 것에는 제대로 망하고 말았다. 이미 망했지만 여기서 더 망하기 전에 떠나기로 결심한다. 한국어 어학연수를 위해서 나의 살던 고향으로...  이제부터라도 입만 나불대며 상상 속에서 살지 않기로 한다. 바라지만 말고 바라는 대로 살자.


이렇게 한국어 어학연수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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