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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우주인 Sep 13. 2022

문명과 문맹 사이의 육아 독립군

인증과 스마트폰


“밭맬래? 애 볼래? “


하고 물으면 나는 망설임도 없이 밭을 매는 엄마다. 둘째를 낳고 키우다 직장에 복귀한 후로는 우리 부부는 자신의 소질 분야에 따라 역할을 분담했다. 나는 살림에 취미가 없다. 설거지통에 설거지거리가 가득 차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고 정리정돈과는 원만한 사이가 아니다. 난장판인 집안의 더러움에도 둔감한 편이다. 하지만 세월아 네월아 님과 베스트 프렌드인 남편보다 8282 한 내가 어쩌다 보니 살림을 맡았다. 천성이 느긋하고 말이 많으며 심각하게 다정한 남편이 육아를 전담했다. 살림과 육아! 그 경계선이 무엇인지 문서화하여 정확히 가른 적은 없다. 단지 남편보다 성격이 급해서 나 혼자 다하고 나서 화만 나던 일들은 대부분 살림과 관련된 일이었고, 입술 서비스가 요구되며 끝없는 기다림과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은 주로 육아였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각자의 인내심의 강도와 성향을 잘 살려 자연스럽게 성사된 합리적인 역할 분담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엄마. 우리 남편은 정말 애만 봐"

"애라도 봐주는 게 어디니? 애 보는 게 쉬운 줄 아니?"


며칠 동안 천성이 느긋하고 심각하게 다정한 외국인 남편의 육아를 목격한 친정엄마는 혀를 찬다.


"우와 쟤 진짜 대단하다. 니 남편은 정말 애만 본다. "


한 주 동안 아이들의 학교와 어린이 집 적응기를 관람하고 남편은 호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절대로 안되고 싶었던 육아 독립군이 되었다. “육아 독립 안 만세”를 부르 지르며 울고 싶었지만 가정 경제의 무게를 어깨에 지고 있는 남편은 나의 어깨 위에 육아의 무게를 넘겨주고 행복하게 떠났다. 우리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혼자서 심심할 이유와 외로울 권리를 마음껏 누리기를... 배짱이 아빠가 애만 보기에 8282 개미 엄마는 나름대로 속이 터지는 나날들도 많았지만, 어찌 되었던 꽤 오랜 시간 동안 애 안 보고 밭매고 집안일만 하다가 한국으로 어학연수를 왔다. 그리고 남편의 호주 귀국으로 인하여 나는 하루아침에 애 둘을 혼자 보게 되었다. 등산 장비도 하나도 없는 초보자인 내 실력으로는 도무지 오를 수 없는 높은 산의 정상을 정해진 시간에 올라야 하는 기분이랄까? 나는 등산을 해본 적도 없고 관심도 없지만 이제 물러설 수도 없다. 난 비록 낙타가 아닌 사람이지만 변장 후 낙타가 되어 조그마한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묘기를 선보이기로 결심을 한다. 지금 당장 낙타처럼 등짝에다가 혹을 붙여야겠다. 하지만 숨만 쉬어도 층간소음을 만들어내는 아이들은 내가 싫어하는 일들만 찰떡같이 잘도 알아내어 내 눈앞에서 보여준다. 자기 물건을 알아서 정리하고 밥 먹은 후 싱크대 위에 그릇을 가져다 놓은 후, 혼자 숙제를 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기회만 생기면 재빠르게 내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가 약 올리기와 염장지르기 등으로 내 영혼의 층간 소음을 만든다.


“애들아~~~ 그만 싸워! 지금 내 말 무시하는 거야?"  

"세수했어? 양치질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나는 알게 되었다. 아이들은 내 말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그냥 안 듣는 것뿐이다. 그 오랫동안 애만 보던 남편이 왜 그렇게 자주 심기가 불편했었는지 그의 감정의 롤러코스트를 이해할 것 같다. 이제는 성급하게 붙였던 등짝에서 덜겅거리는 낙타의 혹을 떼어내야 할 시간. 낙타 변장은 아무나 하나? 작심 3시간.




나는 문명에 의한 문맹인간이다. 아이가 혹시라도 들을까 봐 바로 끄게 되는 뉴스에서 알려주는 세상사에 별 관심이 없다.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라 불리는 물체도 없다. 새로 나온 기계나 신지식들은 내가 알만 할 때가 되면 구식이 되어버린다. 인증 서비스에 해택을 받아야 살기 편한 나의 살던 고향에 사는 친정 엄마는 인터넷에서 아무것도 구입할 수 없는 문맹인간이다. 나도 엄마와 같은 배 위에 손 잡고 사이좋게 앉아있었다. 변화가 거의 없는 느려 터진 나라에 살면서, 변하지 않는 것은 끝없이 변하는 것뿐인 나의 살던 고향 나라에 여행 올 때마다 자진하여 문맹이 되었다.


피하고 싶은 것들은 항상 피할 수 없을 때 찾아온다. 홀로하는 육아만큼 시작도 하기 전에 두려웠던 일은 새로운 신문물을 이용하는 것과 그 모든 것을 이용하기 위해서 인증 시스템에 착륙해서 배우는 것이다. 은행 인증과 전화번호 인증등등 그 끝없어 보이는 인증의 나라에 안전하게 착륙하면 모든 것들이 편하다고 하는데 그 나라에 들어서고 익숙해지는 것이 내게는 미루고 미루웠던 시험 전날 벼락치기 공부로 다가왔다.


지난 17년 동안 줄곧 짧은 한국 방문만 했었다. 그래서 친정엄마의 신용카드에 의지한다던가. 혹은 친절한 친구에게 인터넷 쇼핑 구매대행 서비스를 제공받았다던가. 또는 짧은 기간이니 완벽히 무시하고 지냈다. 하지만 부양가족인 아이들과 함께 하는 한국어 어학연수 고향방문은 달랐다. 나는 이제 대한민국의 문명을 받아들이고 배워야 한다. 지난 17년간의 변화를 8282 업데이트하려고 하니 자주 미치고 팔짝 뛰는 널뛰기를 한다. 나는 과연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인가? 하는 의문은 자괴감으로 제 모습을 바꾼다. 한동안 계산을 해야 할 때마다 자주 식은땀을 흘렸다.


"할인 제휴카드 있으신가요?"

"아니요"

"포인트 적립하실 건가요?"

"어떻게 하나요?"

"해피포인트 있으신가요?


그놈의 해피 포인트 때문에 나는 안 해피하다. 물건이나 혹은 서비스를 지불할 때마다 계속되는 질문에 얼음이 되어버리는 나를 "얼음땡" 시켜 줄 것은 오직 하나이다. 이 인증의 나라에 안전히 착륙하는 것과 내 입장에서는 수만 가지의 물음표인 포인트 서비스 혹은 할인 혜택을 받는 루트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 그리고 그것들을 나의 핸드폰 안에다가 구겨 넣어 스마트폰을 스마트하게 이용하는 법을 알아내는 것, 즉 문명인이 되는 것이다.


은행부터 시작한다. 정말 아는 것이 무궁무진할 것만 같은 대단해 보이는 은행원님이 내 손에 쥐어준 계좌 이체할 때 필요하다는 번호가 가득 적힌 카드!


“대체 어디다가 쓰는 물건인고? “


아는 게 하나도 없는데 당연히 알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알려주는 정보들은 오히려 계속되는 질문과 스무고개를 만들고 마침내 나는 제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싶다. 하지만 은행엔 친절한 총각이 있다. 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문맹이 되어버린 어르신에게 도움을 주는 은행에서 일하시는 친절한 총각은 40대 어르신인 나를 극진히 모신다. 몇 회 집과 은행을 오가야 했고 멀쩡하지만 통화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는 오래된 핸드폰을 오만가지 어플을 지원해주는 새로운 핸드폰으로 교체하는 난리 브루스를 거쳤다. 마침내 친절한 총각의 도움으로 인증번호를 노트북에 다운로드한다. 그리고 인증번호를 핸드폰으로 옮긴다. ARS로 응답하거나 ARS가 알려주는 번호를 누르는 신비로운 ARS 행위를 통하여 드디어 인증의 나라에 입장했다. 은행에서 일하시는 친절한 총각 만만세!


하루아침에 한국 나라에 떨어진 아이들처럼 나 역시 17년 동안 떠나 있었던 익숙지 않은 한국 생활에 대한 적응기간이 필요했다. 여전히 스마트폰에다 집어넣은 그 모든 것들을 능수능란하게 조정하지는 못하지만, 그 세계에 발을 디딘 후로는 한국 세상에서 살기가 참 편해졌다. 여전히 문맹의 세계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친정 엄마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그다음 날 아침 현관문 앞에서 집어 들 수 있는 신세계를 선사할 수 있다. 주문하고 몇 시간 후면 현관 앞에 도착하는 새벽 배송! 로켓 배송! 처음엔 그저 신기하고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언젠가부터 배송기간이 2~3일 걸리면 휴업했다가 발동 걸린 82828282 DNA가 나의 영혼에 스멀스멀 올라온다. 참은 방귀가 더 독하다더니!


“ 왜 빨리 안 갖다 줘~~”


하며 지독한 8282 방귀를 뀐다. 장소에 따라 바로 정반대의 성향으로 변신하는 나는야 카멜레온! 핸드폰이 그저 핸드폰인 곳에서 살다가 스마트 폰이라는 제 이름값을 하는 곳에서 있으니 일상이 꽤 여유로워진 것이 참 좋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스마트폰에 더욱더 집중하게 되어 나의 시간들이 조각조각 나누어지고 퀄리티는 떨어진다. 언젠가부터 스마트폰과 뒹굴고 잠자며 아침엔 함께 눈을 뜬다. 이렇게 스마트폰만 보고 살았던 적이 있었나? 그래도 겁나 편하고 좋고만. 이제 난 스마트폰 없으면 못살겠다. 어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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