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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효로 Aug 05. 2024

연인들

 한 번은 밤비 오는 센트럴 거리를 걸은 적이 있다. 낮에도 번화한 소호와 란콰이펑 사이 길은 밤이 되자 더 번화해졌다. 거센 비가 아니었기에 급하게 뛰어다니며 비를 피할 필요 없을뿐더러, 이미 숙소가 있는 구룡 반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어차피 3배의 가격을 지불하고 택시를 타야 했다. 서두를 필요 없이 밤과 새벽 사이의 시간 속에서 여유를 부렸다. 마찬가지로 번화한 밤을 즐기던 많은 사람들이 비는 안중에도 없는 듯 천천히 떠들며 지나갔다. 높디높은 빌딩의 입구에도 고인 비가 후드득 떨어졌고, 빗물이 떨어지는 차양 아래 반쯤 누워 서로 기대고 있는 한 커플이 보였다. 그 모습에 오랫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참 기묘한 광경이었다. 정적 속에서 두 사람은 밤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술에 취한 듯한 얼굴에는 근심이 미세하게 스쳐 지나갔다. 매우 지쳐 보였으나 갈 곳이 집은 아닌 듯, 서로에게 의지하고 있는 사연이 무지하게 궁금했다. 이 젖어 들어가는 밤거리에 남은 볼일이 뭐길래 남아있는지.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이유는 뭔지. 수많은 의문을 다 떠나서 그 둘의 모습은 뭐랄까, 무척 로맨틱했다.

 홍콩에 살면 종종 영화 같은 커플들의 모습이 마주치곤 한다. 덥고 습한 새벽, 공원 보도블록에 앉아 맥주캔을 기울이는 남녀의 모습을 자주 보았다. 이케아에 쇼핑하러 갔던 어느 하루는 어디서 났는지도 모를 커다란 이동 수레에 여자 친구를 태우고 달리던 남성도 있었다. 가까운 사람들도 예외는 없었다. 기숙사에서는 사감 선생님 몰래 같은 방에서 지내던 발칙한 커플들이 많았다. 처음 이를 알았을 때 내면의 유교 자아가 요동쳤으나 그도 잠시였다. 2010년대 한국 드라마에서 유행처럼 다루던 비밀 동거 키워드의 실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종 기숙사 빨래방에 함께 오는 커플들을 볼 때면 그들의 자유로움과 유연함이 부럽기도 하여 웃음이 나왔다.

 한국에서 보던 홍콩 영화들은 현실의 홍콩과 큰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무간도> 조폭들이 그 날씨에 검은색 정장을 입고 싸우러 다니는 건 말도 안 된다. 10분 만에 푹 젖은 양복 재킷을 들고 다녀야 한다. <화양연화> 속 조용하고 여유로운 로컬 식당도 실제로는 쉽게 발견할 수 없다. 하지만 홍콩에서 만난 연인들만큼은 꼭 영화와 같았다. <아비정전>과 <열화 청춘>의 아비와 루루처럼 과격하고 <열화 청춘>의 루이스와 토마토처럼 열정적이었다. 이것마저 너무 낭만적이지 않은가? 가짜로 꾸며내면 그만인 설정이 사실 현실 반영이라는 점 말이다.

 홍콩 사람들의 특징 같기도 하다. 좀 패기가 있다, 그들은. 입보다 다리가 먼저 움직이는 타입, 혹은 머리보다 심장이 먼저 움직이는 타입이다. 그래서 그런지 가까워지기도 쉬웠다. 영어가 서툰 내가 아주 직설적으로 발언하면, 그들은 두 번 곱씹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 영어가 서툰 두 문화인 사이에서 발생한 특수 현상인가 싶었지만, 그냥 그들은 원래 그렇다는 것을 머지 않아 알게 됐다. 좀 꾸밈이 없는 편이다. (나의 영역으로 거침없이 밀고 들어와 준 현지 친구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표한다. 그들이 없었다면 홍콩에 이 정도로 깊게 잠식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와 ‘스탑’ 사이에는 생략된 무수한 선택지가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열정과 패기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도 안다, 내 시야에는 그들만의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보이는 사랑’이라는 게 있기는 할까. 그럼에도 사랑을 하는 연인들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서로에게 몰입하느라 시끄러운 홍콩 거리의 소음조차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가끔은 영화를 관람하는 기분으로 거리의 연인들을 들여다본다. ‘보이는 사랑’이라는 게 어쩌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착각을 하면서 말이다.

 또는 이렇게 생각해 보기도 한다, 홍콩의 연인들까지가 내가 보고 싶은 홍콩의 모습이라고. 수많은 영화가 탄생한 거리에서 영화 같은 사랑을 하는 사람들을 동경하는 것은 아닐까. 본인들을 둘러싼 모든 분위기가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해 준다는 것을 그들은 모를 테다. 하지만 나는 보았고 감동도 했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까지도 홍콩을 구성하는 일부라고 받아들인다. 그들의 하는 사랑은 평생 유지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방인에게 사진처럼 남은 한 컷만큼은 그들보다 오래, 어쩌면 평생 지속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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