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교환학생 시절 현지인 친구들이나 한국인들이랑만 다닌 것은 아니었다. 가장 친했던 친구 중 매우 글로벌한 무리가 하나 있었다. 학기 초반이었다. 교환학생 친목용 프로그램을 마친 후 서양 친구들 무리에 휩쓸려 센트럴에 따라간 적이 있었다. 밤 11시쯤의 시간이었다. 광장 같은 곳에 모여 술을 마시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클럽에서 밤새워 놀 예정인 듯했다. 이른 일정으로 이미 충분히 피곤했던 나는 그냥 숙소에 돌아오고 싶어졌다. 한국인 무리와 이미 갈라져 버린 탓에 숙소에 돌아갈 택시를 타기도 애매해진 상태였다. (홍콩섬을 다니는 빨간 택시는 구룡반도로 잘 가려하지 않는다. 요즘은 개인으로 운영하는 우버가 많은 편이니, 우버를 사용하길 추천한다) 같은 공간에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친구들이 몇 있었다. 프랑스인 하나, 중국인 둘, 헝가리인 하나 그리고 한국인 하나. 피곤하거나 낯을 가려 밤샘 파티를 하고 싶지 않은 다섯이 모였다. 문제는 우리 중 누구도 광둥어를 쓸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때마침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긴급 숙소 복귀 대책 위원회를 꾸렸다. 중국어를 쓰는 둘이 어떻게든 소통을 해보려 했다. 나머지는 끊임없이 홍콩 택시 앱을 뒤져보았다. 여러 번 묻고 여러 번 서치 한 덕에 겨우 택시 하나를 타고 갈 수 있었고 우리는 이 고달픔을 기리기 위해 채팅방을 만들었다. 광둥어로 택시를 뜻하는 ‘딕시’가 우리의 초기 모임 이름이었다. 딕시 멤버 중 중국인 친구 하나는 잠수를 탔다. 가끔 이 친구의 안부가 궁금하다.
이후 한국 문화를 잘 아는 프랑스인 친구에게 내 다른 한국인 친구를 소개해 줬다. 자연스럽게 둘은 매우 가까워졌다. 모임의 한국인 멤버가 둘이 되었다. 헝가리 친구는 예술 석사 과정에 있었고, 나와 함께 아트 페어나 개인 예술 전시를 자주 다니곤 했다. 중국인 친구는 영화 전공자였기에 함께 얘기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박찬욱의 <아가씨>와 왕가위의 <해피투게더>를 좋아하는 이 친구는 내 인간관계의 또 다른 다양성을 담당하는 친구이다. 뜻밖에 결성된 모임의 우정은 아직도 잘 이어지고 있다.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다.
다양한 국가 사람들이 모여있을 때 가장 흥미로운 주제는 ‘정치’다. 본인 나라의 정치 현주소에 매우 회의적인 것은 만국 공통 같다. 동시에 자국을 향한 비난을 막기 위해 실드도 빼놓지 않는다. 자국 정치의 양면성을 한 번에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참 재미있는 일이다. 나 역시 다르지 않다. 회의적인 입장을 내놓은 후 곧바로 아름다운 점을 내놓는다. 내 모국은 나만 비판하겠다는 심리인 듯하다. 사실 이 친구들을 만나기 전까지 국제 친구들과 이런 주제로 대화하기가 매우 부담스러웠다. 정치적 견해가 다르면 싸우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정치적 대화는 터부시되지 않는가. 같은 문화 배경에다 정치체계를 공유하는 사람들끼리의 싸움도 이리 부담스러운데 유럽인, 중국인과 어떻게 정치 얘기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결론적으로, 우리는 만날 때마다 정치 얘기를 하게 되었다. 진지하게 이어지더라도 싸우지는 않는다. 나의 관점으로 발견할 수 없는 내용의 사건을 들었고 충격도 받았다. 모르는 개념을 들으면 각자 검색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게 꽤 발전적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모든 견해가 긍정적으로 다가온 것은 아니다. 반박하고 싶어지는 주장이 차고 넘쳤다. 하지만 나와 다른 부분이 틀리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대신 상대의 출신 배경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그러면서 사람은 자연스럽게 다르다는 점을 배웠다. 다르다는 특성은 싸움의 원인이 아니라는 점 또한 배웠다.
한 번은 식민 지배 역사에 대한 대화를 나눈 적 있다. 중국인 친구가 먼저 중일전쟁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당시 일본군에 징집된 위안부의 사건을 언급하였다. 한국인으로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이 식민 지배를 당할 때 강제로 끌려간 위안부들의 문제 역시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며 두 주먹을 꽉 쥐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유럽 친구들이 놀라는 것이었다! 나의 어떤 태도에 놀란 것이 아니라 한국의 식민 지배 역사를 처음 알게 되어서였다. 당연히 한국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처음 들은 듯했다. 그러니까 국내에서 정치인이 발언한 단어 하나로 갑론을박을 따지고 있을 때 정작 외국에서는 이 사태에 대해 언급조차 잘 안 됐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다. 그건 중국의 위안부 문제는 잘 인지하고 있던 그 친구들의 탓이 아니었다. 우리는 고차원적으로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해외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 혹은 이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이렇게 나의 것에 대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 종종 생기곤 했다. 사실 우리는 매우 특수한 상황이었지 않았나 싶다. 각국에서 홍콩으로 5명이 모여있는데 또 홍콩 출신은 하나도 없었다. 난 이 상황이 꼭 정상회담과 같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실상은 비정상회담에 더 가까웠을 것 같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내가 소속해 있는 나라를 곧 나와 동일시하게 되곤 했다. 이 모임의 친구들 모두 나와 같은 경험을 했다. 자국의 장점과 단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입장이기에 그렇다. 내 나라의 허점을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도 내 몫, 부끄러움도 내 몫이다.
글을 쓰는 지금, 새삼스럽게 지금 그 친구들의 시간을 떠올려본다. 자고 있을 사람도 몇 있다. 최근에 홍콩에서 예술 워크숍을 다녀온 뒤 유독 헝가리 친구 생각이 많이 났다. 연락해 보니 석사를 졸업하고 개인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라고 한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다시 열심히 사는구나. 놀랍지 않다. 이 친구와 함께 다닐 때면 시각의 차이를 크게 느꼈다. 형형색색의 고층빌딩을 신기해하던 나와 달리 사원이나 절의 모습을 가장 눈여겨보았던 친구다. 아무래도 헝가리에서는 불교나 도교 사원을 찾기는 힘들 거다, 내가 한국에서 컬러풀한 빌딩을 찾기 힘들 듯이.
홍콩이라는 공간이 우리의 모임에 주었을 영향도 생각하게 된다. 나에게만 탐색의 공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모두가 다른 목적으로 홍콩에 들렀다가 뜻밖의 친구들이 생긴 걸 거다. 지금은 물리적으로 너무 멀어진 우리가 다시 한자리에 모일 수 있을까 싶다. ’헤어진 이들은 홍콩에서 다시 만난다(주성철 기자의 저서명)‘고 하던데, 우리가 인연이라면 홍콩에서 다시 만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