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6년 전부터 줄곧 해왔다. 그러나 항상 막연했다. 영화 비전공자로서 진로 탐색을 위한 길이 매우 좁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환학생으로 홍콩에 가기 약 2개월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정말 영화를 좋아한다면 영화가 유통되고 상영되는 현장에서 일을 해보는 건 어떠냐는 지인의 조언 때문이었다.
자원봉사 일은 너무 재미있었다. 나는 영화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포럼의 진행을 도왔다. 함께 일했던 친구들은 나보다 훨씬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고, 홍콩 영화에만 한정하여 잡다한 지식이 많았던 나는 흥미롭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다들 전공이 달랐기에 영화에 대한 지평 역시 다양했다. 그리고 그 당시 부산국제영화제에 양조위가 초청되었다. 개막식 표를 겨우 구해 양조위가 레드카펫을 밟는 현장을 목격했다. 이동진 평론가와 함께 오픈 토크를 하는 것도 멀리서 두 손을 모으고 구경했다.
그전까지 영화제에 관객으로조차 참여해 본 적 없는 내가 봉사자로 참여한다는 것은 매우 색달랐다. 영화를 그렇게 좋아하면서 영화제를 가볼 생각을 왜 하지 못했나 싶다. 대학 생활의 절반을 코로나와 함께 보낸 내게 영화스크린이라는 개념은 OTT 사이트 밖을 나간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영화관에 가는 것마저 제약이 있었으니, 영화제는 더욱 가기 꺼려진 것이다. 홍콩에 가기 전 이 자원봉사 일을 먼저 해본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홍콩에서 열린 무수한 예술제와 전시, 그리고 영화제 관람을 위한 좋은 정보들을 많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홍콩과 관련된 일에 있어서 나는 운이 참 좋은 편이다. 2023년 상반기, 내가 홍콩에 머물렀던 기간 동안 수많은 예술제와 영화 축제가 열렸다. 가장 크게 열리는 ‘홍콩 예술 축제’는 2월에 시작해 5월까지도 지속되었다. 이 밖에도 아트 바셀과 아트 센트럴, 그리고 수많은 작은 개인전들이 끊기지 않았다. 그리고 대망의 ‘홍콩 국제 영화제’가 3~4월에 열렸다. 동시에 4월이 되자마자 장국영과 매염방의 20주기를 맞아 다양한 영화 제작사 및 공공기관에서 특별전을 열어주었다. 그해 4월은 그야말로 홍콩의 영화의 달이었다.
가장 기다렸던 ‘홍콩국제영화제’ 시즌이 되었다. 하나의 지역에서 열리는 일반 영화제와 다르게 홍콩의 국제 영화제는 홍콩 전역에서 열렸다. 덕분에 갈 일이 없던 여러 지역을 쏘다녔다. 상영관이 있는 건물마다 영화제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마치 홍콩 전체에서 영화제를 즐기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는 제목과 시놉시스만 읽고 막무가내로 보러 다녔다. 딱히 고정해서 보고 싶은 장르는 없었다. 일본, 홍콩, 프랑스 등 국가도 다양하게 정하여 영화를 관람하였다. 근 1년 이내에 제작된 영화부터 1960년대 영화까지 제작 연도도 극과 극이었다. 특정 감독의 영화를 여럿 본 경우는 있었다. 정바오루이(소이 청) 감독 전이 열렸기에 4개 정도의 영화를 예매하여 보았지만, 감독의 데뷔 초 작품을 제외한 모든 작품이 취향에서 벗어나 곤욕을 치렀다. 최근 감독의 신작이 부천국제영화제의 폐막작으로 걸린 것을 보았다. 내심 반가웠으나 딱히 보고 싶지는 않았다. 2022년 안락사를 결정하여 생을 마감한 장 뤽 고다르 감독의 특별전도 열렸다. 그의 영화도 3편가량 보았다. 1965년 작 <알파빌>을 가장 재밌게 봤던 기억이 난다.
도합 20편가량의 영화를 바쁘게 보러 다녔다. ‘다작’이 목표였던 내게 최고의 성취였다. 룸메이트는 내게 ‘네가 영화를 찍으러 다니는 거 아니냐?’고 할 정도였다. 지금은 하루에 2편 이상의 영화를 보면 지쳐버리고 마는데, 그때는 하루에 3편까지도 보러 다녔다. 그것도 다른 지역의 상영관까지 찾아가서 말이다. 언제 또 즐길 수 있냐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일단, 영화표 값이 매우 쌌다. ‘영화제’에서 상영한 영화인 탓도 있었을 것이다. (국내에서도 영화제의 푯값은 일반 푯값의 2/3 정도의 가격이니까) 거기에 더해 홍콩은 공연 및 영화 관람을 위한 ‘학생 할인’ 적용이 매우 잘 되는 편이었다. 그렇게 그때 기준 5000원 정도의 가격으로 한 편의 영화를 보러 다녔다. 살면서 그렇게 열정적으로 영화를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치열하게, 또 즐겁게 영화를 보러 다녔다.
그리고 곧바로 장국영과 매염방 추모 특별전을 찾아다녔다. 나와 비슷하게 8090 홍콩영화를 좋아하던 싱가포르 친구가 있었다. 우리는 상부상조하는 사이가 되어 존재하는 모든 특별전을 찾았다. 그리고 모조리 보러 다녔다. 정말 치열한 하루하루였다. 하도 걸어 다녀서 발이 부르텄고, 똥랭차를 하루에 두 잔씩은 마셔야 체력이 유지되었지만, 정말이지, 너무 즐거웠다. 한국에서는 개봉하지 않을 장국영의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스러웠다. 화질도 음성도 지금에 비해서는 형편없었다. 그럼에도 한편 한편이 어찌나 낭만적이었는지 모른다.
한국에 돌아온 후 홍콩에서 왜 그렇게 영화를 많이 보러 다녔는지 생각해 보았다. 첫째, 아마 그건 정보 수색에 들인 노력에 비례하는 만족감이었을 것이다. 자원봉사를 하며 알게 된 여러 정보를 홍콩에서 요긴하게 써먹었다. 어떻게 하면 학생 신분을 잘 활용하여 영화 값을 아낄 수 있는지, 원하는 배우나 감독의 특별전은 어디서 찾아볼 수 있는지, 인기 많은 작품 티켓팅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덕분에 알게 된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둘째, 그냥 ‘영화’라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하루에 세 편을 연달아 보아도, 밥값을 아껴서 보아도, 매번 외롭게 혼자 보아도 재미있었다. 홍콩에서 줄기차게 상영관을 드나들며 느낀 ‘영화’에 대한 호감은 그전까지의 그것 이상이었다. 좋아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자유로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생긴 감정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때 생긴 폭발적인 에너지 덕분에 난 평생 글을 쓰고 이야기를 만들어 낼 힘을 얻었다고 믿는다. ‘영화를 얼마나 좋아하세요?’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이때의 마음으로 대체할 수 있을 정도다.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다양한 영화제를 찾아다녔다. 한국에서의 영화 한 편 값은 너무 비싸다. 한국은 홍콩처럼 가난한 학생을 위한 할인 제도가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나는 꾸준하게 영화관을 가고 싶었고, 이를 위해 선택한 방법 또한 ‘영화제’인 것이다. 하지만 마냥 영화만을 즐겼던 작년과 다르게 올해는 금전적 이해관계를 파악하게 되었다. 사유는 다양했다. 영화제에 올랐던 영화가 개봉하는 경우가 현저히 적었다. OTT 최초 공개가 아닌 이상 홍보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애초에 기획 단계에서부터 예산난에 부딪힌 영화제가 수두룩하다는 것조차 올해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든든한 투자자가 없어 알려지지 않은 영화를 발굴하기 위해 열리는 이런 영화제마저 초기 투자 비용이 점점 낮아지는 상황을 지켜보며 과연 국내 영화 발전이 잘 이루어질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이 된다. 먼 미래에 영화 제작에 대한 꿈을 꾸고 있다면 이것은 곧 나와 직결되는 문제가 된다. 그렇기에 걱정은 더 크다. 어느 순간부터는 영화제를 방문하는 이유에 약간의 책임감도 추가되었다.
이로써 홍콩에서 마음 놓고 영화를 즐길 수 있었던 마지막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직 홍콩은 영화를 포함한 모든 예술에 대한 투자가 넉넉한 상태이다. 적어도 한국보다는 넉넉하다. 신인 감독 양성을 위해 시니어 감독들의 교육이 활발히 이루어진다. 학생들은 정부로부터도 실질적인 기회를 많이 받게 된다. 아무리 마이너한 독립영화도 상영관에 어렵지 않게 올랐고 상영 기간 또한 상당했다. 그런 넉넉함에서 오는 무의식적인 안도감이 영화제를 마음껏 즐기게 하는 마지막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