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효로 Aug 26. 2024

양조위의 눈빛

내가 사랑하는 홍콩 배우들

 배우는 눈으로 말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말에 매우 공감한다. 눈빛을 보면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사실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촌스럽게 구구절절 이야기하지 않아도 저절로 서사를 만들어주는 것만큼 강력한 배우의 한 방이 또 있을까? 202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동진 평론가가 양조위와 오픈 토크를 진행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는 이와 엇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양조위의 눈을 바라보면 빠져버릴지도 모르니 조심해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줄기차게 이동진 씨의 눈을 바라보는 양조위와 기를 쓰고 그를 피하는 이동진 씨가 기억난다.

 종종 언급했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홍콩 배우는 양조위다. 그는 눈이 정말 정말 예쁜 배우이다. 시선 하나만으로도 대사와 대사 사이의 공백을 채운다. 그걸 감독들도 아는지 양조위와 영화만 찍었다 하면 그의 눈을 잔뜩 클로즈업하곤 한다. 특히 왕가위는 이를 요긴하게 써먹었다. 한국인이 기억하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장면은 중경삼림 첫 등장 장면일 것이다. 어쩌면 해당 장면의 양조위는 하나의 이미지다. 한마디도 하지 않고 왕페이가 일하는 가게로 들어오는 그의 공백은 어떠한 느낌으로 가득 차있다. 물론 왕페이가 시끄럽게 ‘California Dreaming’을 틀어놓았기 때문도 있겠다. 하지만 카메라를 빤히 바라보는 양조위의 눈빛이 어떠한 공백을 채우고 있다. 무언가로 가득 찬 분위기는 이동진 씨의 말처럼 오래 못 쳐다볼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하는 것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의 눈빛만 남는다. 그리고 양조위는 출연하는 모든 영화에서 시종일관 눈으로 이야기한다. 가장 좋아하는 양조위의 눈빛 연기 중 하나는 <색, 계>의 마지막 장면이다. <색, 계>를 보는 내내 양조위가 탕웨이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봤다. (개인적인 해석이다) 하지만 탕웨이의 정체를 알고 혼자 조용히 슬퍼하는 그 눈을 보고자 하니 굳건했던 생각이 흔들리는 것이었다. 사랑하나? 저건 사랑이 맞는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지 맡는 역할마다 다른 색을 연기하는 장국영과 반대로, 양조위는 맡는 역할마다 특유의 아우라를 뿜어낸다. 어떤 역할을 맡아도 진중하고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비친다. 아마 여기서도 그의 눈이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그나마 가벼운 캐릭터였던 <해피투게더>의 아휘마저도 눈빛으로는 레이저를 쏘고 있다. 생각해 보니 <해피투게더>에서는 양조위의 눈이 덜 클로즈업되지 않았나. 눈을 최대한 안 보여주는 방식으로 양조위의 진중한 분위기를 지웠다. 그러면 이제 아휘의 악착같은 모습이 남는 것이다.

 스스로도 신기하다고 생각되는 점은, 양조위와 같은 얼굴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금 덜 둥글고 날렵하게 생긴 얼굴을 좋아한다. 그저 그의 연기가 좋았다. 그래서 출연작을 열심히 찾아보았을 뿐이다. <중경삼림> 다음 <화양연화> 다음 <해피투게더>였다. 그다음은 예상치 못한, 바로 <샹치>였다. 양조위에 대한 찬사 빼고는 호평이 거의 없던 영화 <샹치>까지 본 후 인정했다. 그는 최애가 되어버렸다. 솔직히 내용도 잘 기억 안 난다. 그냥 양조위의 눈빛만 기억난다. 이미 찍어놓은 작품만으로도 충분히 연기력이 입증되었는데, 그는 쉬지 않고 작품활동을 이어 나가는 중이다. 작년 홍콩에서는 그의 영화만 3편 개봉했다. 하지만, 기회가 없어 작년에는 그의 작품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최근에 셋 중 하나였던 <골드 핑거>가 한국에서 개봉했다. 들뜬 마음으로 영화를 보러 간 나는 어마어마한 실망감을 안고 돌아와야 했다. 홍콩 영화가 예전만 못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퇴보했을지 상상도 못 했다. 시대 흐름 반영, 스토리, 인물의 서사 전부 엉망이었다. 양조위 본인도 원로 홍콩 배우로서 ‘영화의 질’이 어떤지 모르지 않을 것이다. 홍콩의 영화가 가장 빛날 때를 함께 했으니 말이다. 그는 왜 이런 영화에 출연했을까?

 홍콩 영화배우 최초로 마블 영화에 출연한 그는 같은 해 한국 영화제에 참석했다. 그리고 그다음 해 개봉한 영화 3편에 연달아 출연하는 동시에 한국 아이돌 ‘뉴진스’의 뮤비에 출연했다. 그가 왜 이렇게 많은 활동을 하는지 어렴풋이 짐작은 간다. 양조위는 홍콩 영화의 리부트를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양조위는 홍콩 민주화 시위를 지지한 배우 중 하나였다. 그는 자신의 한 마디가 배우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지 않았을 테다. 하지만 배우 인생만큼 중요한 무언가를 지키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활동을 바라보고 있자면 내심 응원하게 된다. 그의 신념도, 홍콩 영화의 재부흥도. 그럼에도 <골드 핑거> 같은 작품은 찍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부국제 초청 당시 60세를 맞았던 그의 실물은 인상 좋은 할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매끈하게 잘생긴 <중경삼림> 얼굴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난 그 점이 참 좋다. 그의 특유 아우라가 강해졌다. 그리고 그 분위기 형성은 눈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양조위는 웃을 때 눈꼬리가 하염없이 휜다. 눈가 끝이 깊게 파여있는데, 나이가 들수록 그쪽 주름이 선명해졌다. 그래서 이젠 입이 웃지 않아도 눈만은 언제나 웃는 모습이 되었다. 그윽한 눈에 인자함이 더해진 느낌이다.

 새로운 얼굴을 맞이했다는 것은 곧 연기 인생에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는 것이 아닐까. 그가 꾸준히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는 만큼 작지 않은 소망이 빛을 보았으면 한다. 그때까지 나의 덕질도 꾸준할 것이다.

이전 11화 온갖 영화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