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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사과 Jan 08. 2024

필멸의 방정식(19)

"니시무라는 그런 사람입니다."


기철은 말했다.


"우리는 아직 국가의 구분이 명확하던 시절에 태어났어요. 니시무라는 일본, 그러니까 현재 Cade 극동 지부가 위치한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죠. 건강했고, 딱히 정신적으로 유약한 아이도 아니었어요. 적어도 제가 알기로는요. 당시에는 태어나는 아이가 무척이나 많았습니다. 이른바 베이비 붐 세대라는 것이죠. 우리 세대는 인류의 마지막 세대라는 비참한 타이틀을 가지기도 했지만 그의 가문은 니시무라를 정말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니시무라가 가문의 첫 손자라 그런 것이겠지요. 이상하게 아이가 잘 찾아오지 않았던 니시무라의 가문에서 태어난 첫 손자이기에, 그는 모든 이에게 사랑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제가 그를 만난 것은 대학을 졸업한 이후라 전부 그에게 들은 얘기에 불과하지만, 그는 술에 취하면 과하게 솔직해지는 경향이 있으니 아주 틀린 내용은 없을 겁니다. 다시 말해, 니시무라는 불행과 거리가 먼 사람이고, 아주 평온하게 살아왔습니다."


기철은 그 대목에서 살짝 눈물을 글썽이며 주먹을 꽉 쥐었다. 동화의 마지막처럼 해피 엔딩으로 무난하게 끝을 맺을 수 있었던 그의 애처로운 인생을 위로하듯 먼지바람이 일었다.


"하지만 그렇게 행복한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기철이 니시무라를 처음 만난 것은 리처드 박사가 주최하는 학회에서였다. 3일간 계속되는 빡빡한 일정에 지쳐 담배를 피우던 중 니시무라가 먼저 기철에게 말을 걸었던 것이다. 담배 한 대만 빌려줄 수 있겠느냐고. 그때 니시무라의 행색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정리하지 않고 길러 이리저리 뻗친 머리를 노란색 고무줄로 대충 묶었고, 비실하게 자란 염소수염은 가느다란 목을 넘어 가슴까지 흘러내렸다. 게다가 안경다리 한쪽은 어디에 팔아먹는지 안경이 코 끝에 간신히 걸쳐 있었다.


기철은 자신보다 더 한 인간은 처음 본다는 눈빛으로 니시무라를 바라보며 담배를 건네고 불을 붙여주었다. 성인이 되자마자 담배를 피워온 기철의 담배는 꽤나 독했다. 니시무라는 담배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이고 폐를 다 쏟을 것처럼 기침을 해댔다. 그의 기침이 잦아들자 기철은 들고 다니던 물병을 열어 한 모금 권했다. 망가진 모습을 보아서인지, 낯선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긴장이 적잖이 완화되어 전해졌다. 아직 남아있기는 하지만 아까처럼 견고하지는 않게.


마침내 진정한 니시무라는 소매로 입가를 대충 닦으며 질렸다는 듯 담배를 재떨이에 비볐다.


"12미리입니다."


기철이 웃으며 말했다.


"꽤 독하죠?"


니시무라는 인정한다는 제스처로 고개를 두어 번 주억거렸다.


"여기는 무슨 일로 오셨나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기철은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평소와는 달랐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기철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먼저 대화를 건네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니시무라는 그로 하여금 궁금함과 알 수 없는 친밀감을 느끼게 했다. 스스로 말을 걸고도 조금 놀랐지만 다행히 니시무라는 살짝 웃으며 그의 대화에 응했다.


"학회에 참석하러 왔습니다. 평소 리처드 박사님을 존경했거든요. 그의 연구에서는 뭐랄까... 연구자에게 이런 감정적인 표현이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따뜻함이 느껴집니다. 아, 이 사람은 인간을 사랑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왔습니다. 졸업 논문을 쓰고 있어서 참고할 거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지만요."


니시무라는 도쿄에 있는 명문대학에서 인공지능을 연구했다. 나중에 듣기로 1, 2 학년 때에는 학업에 그리 힘쓰지 않아 몇 번 유급되었다. 실은 역사를 전공하고 싶었는데 '사망률 감소 프로젝트'의 실행이 가시권에 들어오자 현재 인류가 영원히 존재할 텐데 역사를 공부해서 뭐 하나 하는 회의감이 들어 홧김에 아무 학과나 선택한 것이다. 인지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에 자신의 인생을 아무렇게나 흘러가도록 둔 것 이것이 그의 첫 번째 불행이다.


그래도 그는 뜻이 맞는 친구들과 아마추어 역사 동호회를 창립해 활동에 몰두했다. 연구 결과를 꾸준히 잡지에 투고했고, 그중 몇 편은 유명한 학회지에 실리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 이상 역사 따위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휴학 후 몇 년간 본가로 돌아가 지식인 흉내만 내며 허송세월 했는데, 인내심이 바닥난 부모님이 집에서 내쫓으며 그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다행히 인공지능은 그의 흥미를 끌만한 소재였다. 역사에 흥미를 보인 이유도 인류의 행동 양식이 궁금했기에 그랬던 것으로 그는 금세 인공지능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졸업할 시기가 다가오자 졸업 논문을 작성하던 중 리처드 박사의 연구를 접했고 박사의 열성적인 팬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기철은 니시무라와 더욱 대화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리처드 박사에게 니시무라를 소개해주었고 셋은 기회가 될 때마다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박사도 니시무라를 마음에 들어 했다. 그렇게 니시무라는 졸업을 하자마자 박사의 팀에서 일하게 되었고 그들은 박사의 추천으로 함께 Cade에 입사했다. 그 뒤로는 나름 평온한 일상이었다. 거대한 진보의 흐름에 기여하고 있다는 들뜸과 인류의 진화를 선도한다는 자긍심은 그들로 하여금 현재 상황에 대한 큰 만족감을 주었다.  


하지만 니시무라는 기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였다. 니시무라는 인공지능을 깊이 연구하며 리처드 박사의 팀에서 나와 자신만의 팀을 꾸렸다. 강력한 인공지능을 로봇에 심어 스스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하는 연구를 진행하던 니시무라는 곧 생을 마감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그는 인간보다 더 인간처럼 행동하는 로봇을 보고 인간 존재의 필요성에 대한 의문을 느꼈던 것 같다. 죽지도 못하는, 그렇다고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지도 못하는, 일하거나 깊게 생각하지도 못하는 현재의 인류는 그의 입장에서 빈 껍데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심지어 자신이 만든 인공지능보다 하찮은 존재로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그의 두 번째 불행이다. 그로 인해(기철이 추측하기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 니시무라...?라는 사람의 정체는 뭐야?"


망령이 물었다.


"과거에는 친구였지요. 만약 살아있다면 여전히 친구일 테고요. 하지만 제가 알기로는 그렇게 주도면밀한 사람이 아니에요. 오히려 너무 덤벙대서 안쓰러운 친구였죠. 자기 관리가 안 되는 것은 당연하고."


"그 이야기를 굳이 지금 하는 이유는?"


"글쎄요.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말이 많아지네요. 망령씨도 그런 경험 있지 않나요?"


"없다."


망령은 그렇게 일축하고 총을 들어 엄폐물 밖으로 난사했다. 비명 소리와 터지는 소리가 정신없이 울렸다. 기철은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왜 이곳에 있는지 끊임없이 생각해야 했다. 그래... 여기는 모가디슈 인근에 위치한 Cade의 구호 시설이다. 그러나 서류상으로 구호 시설일 뿐이고 실상은 Cade의 현지 실험용 시설이다. 기철과 망령은 니시무라의 흔적을 좇아, 그리고 Cade에게 한 방 먹이기 위해 이곳을 습격했다. 유진을 찾고 싶었지만 망령이 동행하는 이유는 유진 때문이 아니었으므로 쉽사리 제안할 수 없었다. 아쉬운 것은 벌써 두 번의 습격을 성공적으로 마쳤지만 기철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Cade가 저지른 난잡한 일뿐이라는 것이었다.


"집중하고 엄호해라. 내가 저쪽으로 달릴 테니 너는 뒤에서 엄호해."


망령은 강철 손가락으로 눈앞에 보이는 건물을 가리켰다. 기철은 혼자 남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과 다퉈 본 적도 없고 죽여본 적도 없는 기철에게 전장의 스트레스는 너무도 가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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