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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사과 Jan 01. 2024

필멸의 방정식(18)

"그래서, 계획은 있습니까?"

기철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눈에 자꾸만 먼지가 들어가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대기의 건조함과 더불어 물을 마신 지 오래되어 눈물도 나오지 않아 눈이 더욱 따가웠다. 남자, 자신을 망령이라 불러달라 말한 그는 기철 앞에 다리를 꼬고 앉아 보란 듯이 시원하게 물을 들이켰다.


"그건 알아서 뭐 하게. Cade의 앞잡이 놈이."


한창 떠들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저런 태도라니, 기철은 자신의 처지는 잊고 짜증을 부렸다.


"앞잡이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Cade에서 하고는 있지만 별로 중요한 직책도 아니고, 신뢰를 받고 있지도 않다니까요? 아니, 저는 오히려 Cade라면 학을 떼는 사람입니다. Cade가 앗아간 게 어디 당신네 것뿐인지 아십니까? 그러니 이것 좀 풀고 이야기하자고요. 괜찮다면 물도 한잔 주시고."


언제 그런 객기가 생겼는지. 소말리아에 오고 나서 기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변화가 일었다. 어차피 여기서 죽나 올웨니에게 죽나, 혹은 Cade에게 죽나, 죽는 것은 매한가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아마 될 대로 되라는 생각. 기철은 몸을 축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유진은 데리고 오지 않는 건데..."


"유진?"


망령은 의외로 유진의 이름에 관심을 보였다. 그는 다리를 풀고 몸을 기철 쪽으로 숙이며 더 자세히 말해보라는 자세를 취했다.


"애인입니다. 세상이 이지경이 되기 전부터 함께 했던 여자예요. 나랑 다르게 상황 판단도 빠르고 현명하죠. 친화력도 좋고 용감하기도 해요. 그녀가 없었다면 아마 벌써 죽었을 거예요. 스스로 삶을 포기하던가 해서."


"아니, 네 사정에는 관심 없다. 유진이라는 이름, 어느 나라에서 사용하는 이름이지? 너처럼 동양에서 주로 사용하는 이름인가?"


"정확히는 과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주로 사용하던 이름이죠. 그리 드문 이름은 아니에요. 길을 가다 크게 유진! 하고 외치면 아마 100명도 넘게 돌아볼 겁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죠?"


"네 나라에서 니시무라라는 이름을 사용하나?"


니시무라, 그 이름을 여기서 들을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니시무라의 이름이 등장하면 자신의 삶에 변화가 찾아온다. 그의 죽음부터, 갑자기 찾아온 편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기철은 무언가 변화할 것이라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아닙니다. 주로 일본에서 사용하는 작명입니다. 대한민국보다 남반구에 위치한 섬나라이지요. 그런데 그 이름은 어디서 들었습니까?"


"아는 이름인가?"


서로 정보를 숨기려다 보니 대화가 겉도는 느낌이다. 기철은 마음이 급해졌다. 이 남자와 자신과 무언가 연결고리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결고리가 생긴다면 뭐라도 진전이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아니, 아는 걸 떠나서 제 친구였습니다. 같이 Cade에서 근무했지요. 얼마 전에 자살했고요. 솔직히 그의 이름을 여기서 들을 줄은 몰랐네요. 실은 죽지 않았다는 의심은 있었지만 말입니다."


망령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색 바랜 낡은 종이였다.


"실험체와 전투 후,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누군가의 의해 살아났다. 물론 몸의 절반이 기계로 대체되기는 했지... 그래도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눈을 뜨고 주변을 수색했지만 이 편지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의심스러운 것이 한 두 개가 아니야. 하지만 그중 가장 말도 안 되는 것은 몸을 기계로 대체하는 이 기술, 내가 알기론 Cade에서도 성공하지 못한 기술이다. 뇌와 신경계를 기계 부품으로 갈아치우는 것과 팔이나 다리를 의수로 대체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지. 심지어 부작용도 없다. 그야말로 신의 기술, 나는 이 이름의 주인을 찾아야 한다. 살려준 은혜를 갚는 것과 별개로, 이 사람을 찾아야 Cade에 더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어."


망령은 그렇게 말하며 종이를 건넸다. 종이에는 익숙한 이름이 적혀있었다.


[Nishimura]


자신과 유진에게 애너그램으로 남겼던 것과 같은 필체다. 그는 니시무라의 필체를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대체 무얼 하고 다니는 건지. 그때 기철의 머릿속에 계책이 번뜩였다.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방안이.


"나는 니시무라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설사 얼굴이 뭉개졌다 하더라도 그의 몸짓, 목소리, 작은 습관 하나로도 그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세월 이상을 함께한 사이니까요. 나를 풀어주세요. 한시라도 빨리 여기서 벗어나고 싶지만 니시무라가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도망갈 수는 없습니다. 아마 그를 찾아가다 보면 유진도 찾을 수 있겠죠. 내가 돕겠습니다. 함께 찾아보지요. 도움이 될 겁니다."


망령은 묵묵히 기철의 말을 들었다. 이내, 결심한 듯 팔뚝만 한 칼을 꺼내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칼을 휘둘러 기철을 묶은 굵은 밧줄을 단칼에 끊어냈다. 손목에 피가 통하며 아릿한 통증과 시원함이 찾아왔다. 그는 손목을 천천히 돌리며 물었다.


"일단 서로 아는 정보를 공유해보죠."


--


소년은 변한 모습을 마주하기 두려웠다. 불쾌하게 확장된 몸의 부분마다 신호가 전달되어, 인지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의 형태가 짐작되었다. 자칫 정신을 놓으면 새로이 확장된 육체에 자아가 먹힐 것만 같았다. 유일하게 자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증거는 눈앞으로 길게 흘러내린 붉은 머리카락일 뿐이었다. 소년의 머리칼은 푸석푸석하게 먼지가 내려앉은 듯한 색이 아니라 수면에 비친 여명처럼 옅고 아름답게 붉은 기운이 은은히 감돌고 있었다. 전후 국제복지사업으로 진행된 전쟁고아와 보호자를 연결해 주는 정책으로 인해 소년은 여러 집을 전전했다. 그들은 소년의 머리칼을 좋아했다. 전쟁의 손길에 더럽혀지지 않고 살아남아 윤기를 발하는 것이 그들로 하여금 희망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리라. 혹은 그저 탐미주의적인 시선으로 아름다움을 탐닉했을 수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건 간에 소년은 보호자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소년은 그들의 시선과 손길이 못내 불쾌했다. 자꾸만 자신이 아닌 머리칼로 향하는 관심을 돌리고 싶어 예의 바른 아이를 연기하기도 했고, 짓궂은 장난으로 보호자들을 당황시키기도 했다.


보호자들은 곧 소년이 가진 불타는 여명에서 흥미를 잃었다. 그들이 머리를 자르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막았기에 침실과 거실 여기저기 붉은 실이 떨어졌다.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퇴근한 보호자들은 붉은 흔적들이 거슬렸고 소년에게 관리를 잘하라며 타박했다. 폭언과 폭행을 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소년은 어느 순간 참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갔다. 한번, 두 번 뛰쳐나가고 다시 잡혀가는 일이 반복되자 아이를 맡으려는 보호자가 사라졌다. 생활이 우선이기에 아름답다는 이유로 귀찮은 혹덩어리를 맡으려는 여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소년은 임시 보호소와 고아원을 전전하다 결국 Cade의 실험체로 팔려갔다. Cade에서의 생활은 솔직히 나쁘지 않았다. 건강하고 신선한 음식이 끼니마다 제공되었으며 깨끗한 환경에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감옥같이 생긴 방이 거슬리긴 했지만 연구원들이 모두 친절하고, 원하면 언제든 나가 몸을 움직일 수 있어 갇혀있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았다. 실험 순번이 본인에게 돌아오기 전까지는.


이상함이 느껴진 것은 잠결에 불편함이 느껴져 몸을 뒤척일 때였다. 몸이 무언가에 묶인 듯 운신이 자유롭지 않았다. 가위라도 눌렸나 싶어 손가락을 움직여 보았지만 별문제 없이 잘 움직였다. 무엇보다 가위 특유의 몽롱하고 바위에 눌린 듯한 답답함이 없었다. 상황을 파악하기 전에 눈꺼풀 위로 하얀빛이 쏟아졌다.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명순응이 될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이내 소년은 천천히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실험실이라기보다는 수술실 같은 공간이었다. 하얀 배경에 정육점의 고기 덩어리 같이 천장에 매달린 기계들, 자신이 누워있는 수술대 옆에 놓인 수술용 카트, 여전히 눈부시게 빛을 쏘아대는 조명, 불쾌한 침묵 사이로 끼익대는 기계의 헤비메탈이 들려왔다. 두려움이 몰려왔다. 호흡이 가빠지고 동공이 확장되어 주변 사물을 인지하기 어려워졌다. 마구 몸부림을 쳤지만 단단히 조여진 벨트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수술실 문이 열리며 급하게 수술복을 입은 사람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소년을 잡아 반항하지 못하도록 내리누르며 팔에 주사를 놓았다. 소년은 정신을 잃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지만 약물이 혈관을 타고 흐르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들이 매스를 꺼내, 날을 자신에게 향하는 장면이었다.


다시금 눈을 떴을 때 어둠만이 가득했다. 위잉- 하는 기계소리만이 벽에 부딪혀 돌아와 방의 구조를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목 뒤부터 꼬리뼈 부근까지 뻐근한 이질감이 들어 상당히 불편하고 불쾌했다. 하지만 몸을 뒤척이는 것조차 쉽지 않을 정도로 몸이 무거워, 가만히 누워있을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전쟁과 고난이 어린아이를 쉽게 어른으로 바꾸어 놓고는 한다. 감당하기 어려운 세상의 본모습을 몸소 체험한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빠르게 지옥을 받아들인다. 세상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깨닫고 순응하며 적응하는 것이다. 붉은 머리가 아름다운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현재 자신이 보고 있는 이 세상이 지옥 그 자체이며 이보다 더 한 곳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신음과 비명이 가득하며 길을 걷는 사람들은 모두 세상의 고뇌를 홀로 짊어진 듯 고개를 숙여 땅을 보고 있었다. 작고 소중한 생명들에 대한 배려는 찾아볼 수 없었고 언제나 와각지쟁이 벌어졌다.


인간은 상상력은 무한하지 않다. 인간의 상상력은 현실에 기반하기에 이를 벗어나기 어렵다. 두뇌의 용량이 무한한 상상력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도 있겠지만, 상상력은 기존의 지식과 현실을 토대로 확장되고 변화하는 과정을 토대로 하기 때문이다. 동굴에 갇혀 한 번도 하늘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감히 하늘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하물며 난다는 것을 가늠이나 할 수 있겠는가? 더 한 지옥을 떠올리려는 소년도 그랬다. 소년은 자신이 겪은 세상을 바탕으로 지옥을 상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상보다 더한 곳은 상상할 수 없었다. 육체적 고통을 떠나 이들에게는 희망과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기반이 없었으니까.


목이 탔다. 대상 없는 갈망이 소년의 속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연약한 손이 마구잡이로 비틀렸다. 사랑스러운 붉은 머리칼이 거슬렸다. 머리카락과 두피를 뜯어내 두개골을 열고 뇌를 시원하게 긁고 싶었다. 소년의 두뇌에서 말초신경까지 단 하나의 생각이 기어 다녔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욕망 중 가장 원초적이고 매서운 욕구가 신경계와 혈관을 태우는 듯했다. 지난날 자신의 고통을 비난하며 혐오하던 주위의 추악함이 한 데 모여 너무나 귀중한 것이 되었다. 순수했던 육체와 이별을 고하고 새롭게 악몽을 받아들인 소년은 어느새 자신의 모습을 인지할 수 있었다. 더 이상 가시광선이 필요하지 않게 눈 대신 렌즈가 끼워져 있었다. 빛 자체가 없는 공간을 대비해 음파로 주위를 탐지할 수 있는 장치도 달려 있었다. 경추부터 흉추를 지나 요추, 천추와 미추까지 달린 거대한 기계 팔은 소년의 의지에 반응해 천천히 움직였다.

문득 얼굴을 더듬었다. 매끈한 피부가 느껴졌지만 너무나 인공적인, 이질감이 드는 피부였다.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눈물샘이 잘려나가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살고 싶었다. 타고난 생명의 본모습을 오롯이 간직한 채 살고 싶다는 욕구가 솟구쳤다. 과거, 소년의 나약함을 탈피하고 어른이 되어 이 지긋지긋한 세상에 당당히 설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 날이 빠르게 다가오기를 바랐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자신이 그리도 떨쳐내고 싶어 하던 나약함, 추악함, 삶의 무질서함과 폭력성, 상스러운 언행들 모두 그간 꿈꾸었던 흐릿한 예술보다 선명하고 생생하게 다가왔다. 시야가 붉은색으로 물드는 느낌이었다.


"실험 시작하겠습니다."


갑자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파편이 벽에 부딪혀 온몸으로 전해졌다. 바람결에 전해지는 작은 움직임조차 고통스러워 몸부림쳤다.


"LSD를 포함한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마약과 디뉴로-3을 조합한 약물을 투여하겠습니다."


등 뒤에서 뜨거운 것이 척추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온 신경이 불타오르는 듯했다. 눈앞이 번쩍거리고 동시에 덜 마른 유화처럼 흘러내렸다. 근신경계가 불타오르며 몸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이대로 뛰쳐나가 한바탕 달리고 싶었다. 끈적한 침이 턱 끝에 맺혔다.


"기록하겠습니다. 피험체 심박수 증가, 바이오 리듬 이상, 뇌파 이상......"


목소리가 멀어져 갔다. 눈앞에 글자가 이리저리 떠다니며 소년의 몸을 가격했다. 그중 하나가 혓바닥을 스치며 반대편 벽으로 나아갔다. 먼지가 쌓인 곰팡이 핀 빵의 맛이 났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생명의 감각이 흐려져 이 공간과 하나가 된 듯 확장된 듯했다. 살려달라 외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몸에 힘이 빠져 말할 힘도 없는 게 아니었다. 생명을 구걸하는 언어와 행위 자체가 삭제된 듯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머릿속에서 맴돌며 어지러움을 야기할 뿐이었다. 처절한 외침은 벽 밖에 닿지 못했고 실험은 주기적으로 계속되었다.


끔찍한 것에 대한 열망이 인간을 지나치게 지배하면 인간의 몸은 어느새 그에 중독되어 아무런 죄의식 없이 이를 행하게 된다. 소년은 실험체로써 Cade의 '죄' 그 자체였다. 그들은 양심과 자유를 잃어버렸고, 이를 실험체들로부터 강탈했다. 말살당한 선을 향한 의지가 방황하여 세계를 떠돌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주 작은 빈틈이 이 의지가 개입할 틈을 벌렸고 소년을 비롯한 실험체는 탈출할 수 있었다. 누군가 모가디슈 외각에 일으킨 대규모 테러로 거대한 폭발과 화염이 생겼다. 조사에 따르면 흑인 한 명, 동양인 한 명의 소행이라고 하는데, 어찌 되었든 덕분에 소년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폭발로 발생한 분진 때문에 먼지들이 연구소로 들이닥쳤고 이로 인해 전자기기들이 오작동을 일으켜 그들을 제어하던 시스템에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생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소년을 비롯한 실험체들에게 퍼졌고 탈출이 가능해졌다. 소년은 온갖 추한 꼴로 땅을 구르며 탈출에 성공했다. 자신의 렌즈가 고장 난 것인지 도망치는 모든 실험체들의 머리칼이 붉어보였다. 마치 붉은 개미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는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오랜만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소년은 그 길로 폐공장지대에 숨어들었다. 자신의 형태가 얼마나 망가졌는지 실험을 당하며 충분히 알았기에 사람들 사이로 숨어들 수 없었다. 언제나 버림받았지만 외형만큼은 사랑받는 아이 었기에 그 박탈감은 더욱 시리게 전해졌다. Cade의 개조 때문에 삶을 유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주위 환경에 잘 적응하도록 만들어진 육체 구성은 소년으로 하여금 생명을 영위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도왔다. 그러나 인간은 짐승처럼 살아갈 수 없는 법. 때로는 사무치게 외로움과 공허함이 밀려왔다. 비로소 이 세상에 홀로서기를 할 수 있었음에도 살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약물 부작용도 괴로움을 더했다.


그날도 그랬다. 스스로를 끌어안고 고독에 잠식당해 울부짖고 있었다. 땅을 통해 진동이 전해졌다. 발소리에 망설임이 없고 일사불란한 것을 보니 전문가임이 확실했다. 원하지 않았지만 육체에 부착된 혹덩어리가 프로그래밍된 대로 움직였다. 소년의 의지와 상관없이 살육의 시간이 다가왔다.


--


보안팀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전장의 프로였으며,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칼날 위의 세계를 살고 있는 자들이었다. 누군가는 온 신경을 다해 이뤄낼 만한 일을 숨 쉬듯 쉽게 해 버리는 그들이었기에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납득할 수 없었다는 게 적절한 표현일 듯하다. 전장의 기류가 흐른 뒤로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팀원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동료가 내지르는 외마디 비명조차 듣지 못했다. 분명, 분쟁 지역에서 질리도록 봐 온 신체 확장체를 장착한 소년이라 들었건만 현 상황은 상정 외였다. 그들은 광기에 휩싸여 피아식별 없이 주변을 파괴하는 괴물이었다. 그러나 확장자(그들은 실험체를 확장자라 불렀다.)를 사냥하는 쪽은 언제나 Cade 보안팀이었고 자신을 불사르며 울부짖는 그들은 손쉬운 사냥감이었다. 가만히 두면 결국 힘을 다해 스러지기에 그저 차단선을 구축하고 견제하며 확장자의 힘을 빼는 것이 보안팀의 대(對) 확장자 전술이었다.


죽음을 벗 삼아 온갖 분쟁 지역에 파견되는 이들이기에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다만, 자존심이 상했다. 사냥꾼이 사냥감에게 사냥을 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자신이 사냥감이라는 것을 인지하기도 전에 사냥당하고 있다면 그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확실히 그들은 이미 거미줄에 걸려들었으며 천천히 말라죽을 운명에 놓여있었다.


"이런 씨."


팀장이 바닥에 침을 뱉으며 나지막이 으르렁댔다. 그 또한 팀원들과 마찬가지로 전장에서 굴러먹은 베테랑이자 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사내였다. 이미 자신들의 위치가 파악당하고 있는 입장에서 기도비닉 따위는 의미가 없어졌기에 그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확실히 그에게도 남들과는 다른 비범한 면모가 있었다.


"팀장님, 철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주경계를 하던 팀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보안팀 내부에서 천천히 독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아무리 귀신같은 실력을 가지고 있고 괴물과 싸우는 것이 익숙하다 해도 미지의 적을 마주해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총구를 흔들리지 않도록 훈련받은 그들이라 할지라도 내재된 근원적인 두려움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팀장은 곁눈질로 팀원을 훑으며 이내 결심한 듯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총을 들어 자신에게 말을 건넸던 팀원을 머리를 쏴버렸다. 소음기를 장착했기에 폭음 같은 소리가 울려 퍼지지는 않았다. 이전보다 더한 침묵에 사위가 고요했다.


"우리는 사냥개다."


어느새 담배를 꺼내 물고 긴 연기를 내뱉으며 팀장이 나직이 읊조렸다. 팀원들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죽는 게 무서워? 저 괴물이 두렵나? 인정하기엔 자존심이 상하겠지 우리는 언제나 포식자였으니까."


팀장은 자신이 쏘아 죽인 팀원을 발판 삼아 발을 올리고 삐딱한 자세로 전원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 귀기가 서렸다. 주변의 기온이 내려간 듯 팀원들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경계가 흐트러지고 대열이 무너졌지만 더 이상 식별불가의 적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팀장이 내뿜는 살기가 워낙 지독해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물어뜯길 듯한 날카로운 감각이 팀원들의 목덜미를 스쳤다.


"인정해라. 우리는 지금 사냥당하고 있다. 어디서 들어보지도 못한 맹수가 나타나 우리 형제들을 하나 둘 지옥으로 데려가고 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다시 말한다. 우리는 사냥개다. 주인이 짖으라면 짖고 물으라면 물어야 한다. 우리 주인이 저 괴물을 물어뜯으라 했다. 우리 중 하나만 남는다 해도 결국 괴물자식을 죽인다면 임무는 성공이다. 죽음이 두려우면 빠져라. 자존심이 상하면 어디 반군에라도 들어가서 영웅 취급을 받던가 해라. 그게 아니라면 정신 차리고 집중해라. 지금 필요한 건 늑대가 아니라 말 잘 듣는 사냥개다."


팀장에 대한 두려움인지, 그의 종용에 자신의 본분을 자각한 것인지, 팀원들의 눈에 팀장 같은 귀기가 흘렀다. 별 다른 대답 없이 다시금 작전에 나선 그들의 몸놀림이 확연히 가벼웠다. 두려움과 긴장에 굳은 몸이 풀리자 연계 또한 수월해졌다. 오랜 시간 함께한 만큼 따로 신호를 주고받지 않아도 그들은 각자 자신이 할 일을 했다. 누군가는 외벽을 타고 옥상에 올라 지대를 조감했다. 다른 팀원들은 주변을 경계했고 나머지는 주변을 수색했다. 그들에게서 이전과 같은 빈틈을 찾아볼 수 없었다.


얼마나 수색을 더 이어갔을까, 공장지대 전체를 훑었다고 판단이 섰을 때 즈음 뒤에 심어둔 트랩에서 신호가 울렸다. 자세한 방법은 모르지만 아주 교묘한 방식으로 그들의 포위망을 헤쳐나간 것이다. 트랩이 작동된 이상 괴물이 빠져나갈 곳은 없다. 트랩은 작동된 곳의 좌표를 기점으로 주변의 다른 트랩을 활성화하여 목표물의 위치를 확정 짓는다. 한번 특정된 목표물의 위치는, 주변 사물의 위치와의 관계를 확률적으로 계산해 도출한 값으로 결정되어 벗어나기란 쉽지 않다.


"드디어."


팀장이 만족스러운 듯 씩 웃었다. 헬멧에 달린 바이저의 인터페이스에 목표물의 위치가 표시되었다. 따로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건만, 사냥개들은 능숙하게 행동을 개시했다. 귀신같은 솜씨로 퇴로를 차단하고 은, 엄폐를 실시했다. 드디어 사냥감과 사냥꾼의 위치가 역전되었다. 팀장은 몸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당당히 공터에 섰다. 본래라면 생체 신호를 내는 더미를 미끼로 사용하지만 그도 어지간히 짜증이 났던 모양이다. 팀장은 총구에서 소음기를 뺐다. 거추장스러운 사이트(sight)와 부착물을 제거했다.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듯한 이 순간에서만 느껴지는 야릇한 쾌감. 그는 이 감각을 좋아했다. 의도적인 심호흡을 통해 미친 듯이 혈관을 달리던 피를 진정시킨 팀장은 선명한 시야로 전방을 응시했다. 점차 괴물이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잠시 눈을 감고 속으로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넷... 열!


갑자기 바닥이 솟구쳐 오르며 일반적인 생명체의 형태라 할 수 없는 것이 튀어나왔다. 날카로운 금속 재질의 칼날이 달린 꼬리가 그의 목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때에 팀장은 피하지 않고 앞으로 한 발을 옮기며 방아쇠를 당겼다. 폭음이 여럿 울리며 괴물이 나가떨어졌다. 놀라운 솜씨와 배짱으로 괴물을 날려 보낸 팀장은 목덜미에 그어진 실선에서 흐르는 피를 닦았다. 아직 격렬하게 몸부림치는 그 괴물을 향해 총알이 날아와 박혔다. 지정된 위치에 대기하던 보안팀이 제압사를 시작한 것이다. 먼지가 자욱이 피어올랐다. 이내 팀장이 주먹 쥔 손을 들어 올리자 사격이 멈췄다. 그는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괴물에게 다가갔다. 괴물은 벌집이 되어있었다. 팀장은 괴물을 발로 차 뒤집으며 그것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준 후 명령을 내렸다.


"주변 정리하고 본부로 돌아간다. 어떤 미친놈들이 일을 낸 모양이야. 짐작 가는 바가 있으니 준비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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