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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사과 Dec 29. 2023

필멸의 방정식(17)

"그 아이는... 어떻게 된 건가요?"

어느새 남자의 이야기에 빠져든 기철은 자신의 처지도 잊고 물었다. 다행히, 남자도 흥이 올랐는지 별다른 반응 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저 사체를 바라보았지. 잔인한 광경이라 넋이 나갔던 건 아니야. 그 정도 시체는 내전 중에 수없이 봤거든. 더 끔찍한 것도 많았고. 근데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래, 이건 아니었어. 그 아이를 전쟁에서 만났다면 내 손으로 더 처참하게 죽였을 수도 있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내가 죽이지 않으면 먼저 죽는 냉혹한 곳이 전쟁이니까. 그렇지만 사람을 장난감 취급하는 건 안돼. 내 말에 어폐가 있다는 건 잘 안다. 그래도 그래서는 안 되는 거야."


남자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더 먼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자신이 전장에 발을 들인 순간에 대한 기억이었다.


"폭력은 정당화할 생각은 없어. 내가 말하기는 우습지만, 폭력은 폭력일 뿐이야. 아무리 거창한 이유를 붙여도. 내 과거에 대한 이해를 바라지는 않는다. 나는 병사고, 죽이는 게 내 임무였으니까. 꽤 훌륭한 병사였지. 그런데 그 아이를 쏴 죽이고 나서 내 안의 무언가가 변했다. 총이 너무나 무겁게 느껴졌고, 피비린내가 역겹게 느껴졌어."


전장에서 오래 살아남은 전사들이 으레 그렇듯 그는 생명의 무게에 무뎌져 있었다. 게다가 유아기의 트라우마와 무감각하게 타고난 성정은 그를 냉철한 병사로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불을 꺼트린 생명들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길은 언제나 시체를 먹고 자란 붉은 꽃으로 가득했다. 남자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도저히 알아차릴 수 없었다. 어지러움이 심해져 자꾸 구역질이 나왔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흘러내려 눈썹을 적셨다. 불쾌한 적막감이 그를 옭아맸고 몸에서 묘하게 중독적인 불쾌한 냄새가 났다. 구토감이 점점 심해져 자꾸 신트림이 올라왔다.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나던 그는 이내 무릎을 꿇고 한바탕 구토를 했다. 흐드러지게 핀 프리지어 위로 붉은 머리 소년의 사체가 뉘어있었다. 남자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구토로 인해 눈물샘이 자극되어 눈물이 흐르는지, 의미 모를 감정의 소용돌이가 그를 집어삼켰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그렇게 한바탕 울고 말았다.


눈물이 잦아들며 한 사람이 떠올랐다. 노병. 이름도 모르고 지금은 얼굴도 희미하지만 그의 마지막은 아직도 선명하다. 처음 소년병으로 입대하던 때, 모두가 그를 도구 정도로 취급했지만 한 노병만은 그를 보듬으려 애쎴다. 감정을 보이지 않고 어린 맹수처럼 전장을 휘젓는 그를 보며 노병은 안쓰러운 눈길을 보냈다. 그 또한 전장에서 굴러먹은 전사였기에 따뜻한 말과 애정을 보여줄 수는 없었지만 보급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아 모든 것이 부족한 반란군 진영에서 노병은 자신의 몫을 떼어주는 호의를 보였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아본 적도, 교육 기관에 다닌 적도 없었기에 남자는 그 행위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저 짐승처럼 달려들어 노인이 나누어주는 빵과 수프를 탐할 뿐이었다.


그런 남자의 행태에도 노인은 그에게 손찌검을 하거나 소리치며 쫓아내지 않았다. 노병이라고 해서 정규 교육을 받거나 안정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세계대전 시절부터 살아남아 배운 기술이 전투밖에 없어 용병처럼 이리저리 떠도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노병은 자신이 아는 최대한의 배려를 남자에게 보였다. 그는 남자에게 읽고 쓰는 법을 알려주기도 했다. 정부군이 뿌려대는 전단지부터 전쟁통에 어디서 구했는지 알 수 없는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같은 고전까지 글이 적혀있다면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교재로 삼았다. 반란군 동료들은 노병을 비웃었다. 남자를 노병의 애완동물이라 부르기도 했다. 짐승에게 읽고 쓰는 법을 알려줘서 어디에 쓰겠냐며 그들이 지나가면 쓰레기 따위를 던지기 일쑤였다. 반항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 늙다리가 나를 멋대로 데리고 다니는 거라고 소리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군이기는 했지만 질서가 제대로 잡혀있을 리 만무한 반란군이었기에 남자의 반항을 폭력으로 진압할게 뻔했다. 또한 남자가 맞다가 죽었다 하더라도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을 것이었다. 결국 남자는 노병에게 붙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기묘한 공생관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나고 만다. 정부의 부실한 재정과 독재에 맞서 반란군에 가담하는 시민들이 많아지자 정부군의 대규모 토벌이 시작되었다. 정부군은 총과 칼 대신 화염방사기와 전기톱으로 무장했다. 그들은 반란군의 예상 집결지로 향하는 모든 길을 막고 나무를 베어 불을 붙였다. 순식간에 화염이 치솟았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화재로 인해 국지적인 빙하기가 왔을 정도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총과 칼, 폭탄을 들고 덤비는 인간이나 로봇 따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혀를 날름거리며 다가오는 거대한 화마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압도당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온 사방이 붉은 벽으로 가득했다. 남자는 멍하니 불을 바라보았다. 그들을 삼키려 다가오는 거대한 뱀이 미치도록 아름답게 느껴졌다. 자신도 모르게 한 발을 내디딘 순간, 노병이 그를 번쩍 안아 둘러멘 채 달리기 시작했다. 불의 마력에 매혹된 남자는 하염없이 불을 바라보았다.


"정신 차리거라 아이야."


노병이 그를 어딘가에 내려놓은 뒤 가래가 끓어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노인이 남자를 데려온 곳은 반란군이 식수원으로 사용하던 호수였다. 이곳이라면 불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게 종말인가요? 지난번에 들려준 라그나로크. 이게 바로 그것인가요?"


남자는 불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제가 지금까지 봤던 어떤 광경보다도 아름다워요. 저 색감, 열기, 냄새, 모든 것이 완벽해요. 나는 이 순간을 언제나 그려왔어요. 모든 것이 재로 변해 다시 시작하는 이 순간을!"


광기 어린 남자의 눈을 한참 바라보다 노인이 쿨럭거리며 말했다.


"아이야. 이건 라그나로크가 아니란다. 재생을 위한 파멸 같은 고상한 것도 아니란다. 이건 그저 폭력, 무자비한 발길질에 가까운 것이다. 본질을 착각하지 말거라."


노인이 남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묘한 열기와 흥분으로 가득 찬 노인과 눈이 마주치자 남자는 압도당하는 느낌을 받았다. 노인에게도 저 불과 같은 무언가가 타오르고 있었다.


"작은 아르고노트야. 나의 이아손아. 너는 미래이자 삶 그 자체이고 나의 속죄란다. 부디 살아남거라. 살아서 너의 황금양을 발견하려무나."


그 말을 끝으로 노인은 쓰러졌다. 노쇠한 그가 버티기에 연기가 너무 유독했고 열기가 너무 뜨거웠다. 남자는 아무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다만 노인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보여준 열기가 무엇인지 미치도록 궁금했다. 이 메마른 장작 같은 육신이 어찌 저 거대한 불과 같은 마력을 내뿜을 수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연기를 너무 들이마신 탓인지 남자는 물가에 쓰러졌다.


남자는 되살아난 옛 기억이 두려워졌다. 그제야 노인의 마지막 말이 이해가 되었다. 도저히 이 총을 쥐고 있을 수가 없었다. 총, 이 무섭도록 잔인한 고철덩어리. 이 작고 기초적인 기계에서 발사된 납덩어리가 육신에 파고든다. 회전하며 날아간 총알은 육체를 뚫고 들어간다. 동시에 그 안에서 소용돌이치며 찢어발긴다. 남자는 자신의 아르고노트를 스스로 부수었다. 자신에게 더 나은 선택지가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편한 길을 택했다. 주관을 가지기보다 명령에 복종하기를 택했다. 지역에서 드물게 글을 읽고 쓸 수 있었고 이후 장교 교육대에 입소하며 교육도 받았지만 이성보다 폭력을 택했다. 목소리를 내기보다 침묵을 택했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총을 내려놓고 제복을 벗어 사체를 덮어둔 뒤 깊은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무도 자신을 찾지도, 알아보지도 않는 곳으로.


남자는 그렇게 이 교외지에 정착했다. 지쳐 한 때 자신을 돌봐준 노병처럼 노인이 되어버린 남자는 이곳에 머물기로 했다. 사람들은 남자를 쉽게 받아들였다. 남자의 경험과 지식이 이들에게 도움이 되기도 했고 남자가 아이들에게 보이는 모습이 퍽 믿음직스러웠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일을 나가기 전 남자에게 아이들을 맡겼고 남자 주변에는 자연스럽게 교실이 형성되었다. 아이들은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즐거워 매일같이 찾아갔다. 남자의 풍부한 경험과 남다른 시선으로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생명력을 얻었다. 약이 없었지만 그는 괘념치 않았다. 가끔 찾아오는 발작을 제외하고는 그리 불편하지 않았고, 어차피 이런 노인의 일손이 필요할 정도로 사람이 부족한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의수가 힘을 쓸 곳은 없었다. 점점 신경이 죽어 감각이 흐릿해지는 것이 느껴졌지만 오히려 만성적으로 달고 살던 사이키델릭한 환영이 보이는 빈도가 줄어들어 나름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인의 평안은 Cade의 잔재로 인해 다시금 위협받았다. Cade가 떠나간 공장이 가동을 중지하고 온갖 범죄자, 테러리스트들이 폐공장에 숨어들며 인간이라 부르기 애매한 녀석들까지 기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일개 패잔병이나 테러리스트 놈들은 무시해도 괜찮지만, 노인이 흘려들을 수 없는 소문이 마을에 돌았다. 자신이 Cade를 혐오하게 된, 그래서 떠나게 만든 그 실험체가 폐공장에 있다는 소문. 마을 사람들이야 자세한 사정은 몰라 그저 '괴물', 혹은 '그것'이라 불렀지만 외형을 전해 들은 남자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폐공장의 소문을 들은 노인의 눈에 살기와 열기가 맴돌았다. 자신이 미루고 도망쳐 온 일에 대한 속죄를 할 수 있음에 대한 기대감인지, 처음으로 찾은 삶의 터전에 대한 애착인지, 아니면 '그것'에게 안식을 선사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인지, 오랜만에 피가 끓는 것을 느꼈다. 마을 사람들이 집에 돌아간 이후 노인은 혼자 남아 의수의 나사를 조이고 기름을 먹였다. 마지막 싸움을 준비하는 그의 모습은 진중함을 넘어 어딘가 경건하기까지 했다.


한참을 정비하던 그는 결심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의 뒷모습은 기억 속의 노인과 닮아 있었다.


폐공장 지역은 버려진 공간 특유의 음습함으로 가득했다.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과 설비로 인해 빛이 바닥까지 전달되지 못해, 차갑고 무거운 공기가 폐부를 채웠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욱이 피어오르는 먼지가 시야를 자꾸 가렸다. 바람마저 이 공간을 피해 가는 듯 공기가 순환되지 않아 먼지와 차가움이 가라앉지 않았다. 노인은 손을 내저으며 신중하게 나아갔다. 오랜만에 끌어올린 전투의 흥분 때문인지, 아니면 답답한 공간 탓인지 자꾸만 목이 칼칼해졌다. 수색을 나온 지 벌써 3일 차다. 외각지역부터 야금야금 훑으며 폐공장 지역을 수색했지만 특별히 수상한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노인의 수색 방법이 구닥다리라거나 실력이 녹슬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는 인격과 사고가 발달하는 소년기부터 시작하여 자신의 삶 절반 이상을 전장에서 보냈기에 행동 양식이 전장에 최적화된 말 그대로 인간 병기였다. 게다가 드론을 띄워 빛을 조사해 반사되어 들어오는 정보를 이미지로 재구성하는 방식의 수색은 얼마든지 속일 수 있는 방법이 있어 게릴라들을 상대하는 일선 수색대는 예로부터 CQB(Close Quater Battle의 약자로 은, 엄폐물이 많은 도시 전장에서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며 장애물을 극복하고 적을 제압하기 위한 근접 전투 기술이다. CQC라고 부르기도 하며 팀원 간의 소통, 개인의 능력을 기반으로 한 역할 분담 등이 매우 중요하다.)를 활용한 전방위 수색을 전술의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온갖 전술과 실전에 적용할 방법을 체득한 노인이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상대가 그를 뛰어넘는 실력의 소유자 거나, 그가 알지 못하는 최첨단의 기술로 흔적을 숨기고 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녹슨 몸으로 혼자서 넓은 폐공장 지대를 수색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다. 강인한 정신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까지는 잘 해내왔지만 계속해서 혼자 경계를 유지하고 흔적을 발견하기 위해 수색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노인은 방진 마스크를 벗으며 건물 외벽에 잠시 몸을 기댔다. 신중한 성격의 노인은 주변 정찰을 다 끝내지 않은 상태에서 쉬는 것에 대해 강력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에 오히려 건물 밖에서 쉬는 것을 택했다. 노인의 판단이 맞다면 적에게는 저격형 병기가 없을 것이다. 총기를 사용하는 것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며 순간적인 판단이 중요한 일이므로 중추 신경계를 전부 교체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녀석들에게 올바른 총기 사용이란 불가능하다. Cade의 연구진도 이를 고려했을 것이므로 총기와 같은 병기를 탑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적의 신체능력을 인간을 초월한 것이기에 건물 안에서 마주하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당하고 말 것이다. 노인은 이를 근거로 건물 밖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주변을 은근히 경계하며 노인은 바닥에 침을 뱉었다. 먼지로 인해 끈적해진 가래가 바닥에 부딪혀 먼지를 피워 올렸다. 배낭에서 물을 한 모금 마시며 노인은 생각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요새 자신의 인생을 반추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그를 이끌어주던 존재가 무자비한 폭력 앞에 스러진 뒤 그의 영혼은 바람결에 떠돌았다. 어쩔 수 없었다며 자기 합리화를 할 생각은 없다. 그는 전사였고 전사의 목적은 파괴니까. 하지만 적을 제압하고 죽일 때, 어쩔 수 없이 상대의 숨결이 나와 뒤섞이고 피가 내 몸을 적실 때 언젠가부터 몸 안에서 무언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곤 했다. 성실한 노동자는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해 간다. 노동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자각하는 노동자에게 게으름이란 계절의 섭리에서 벗어나 엄숙한 삶의 행렬에서 떨어져 나가는 행위이다. 고통스러운 일의 저주를 땀방울로 씻어내 영혼을 정화하듯 모든 노동에는 진심 어린 열망과 헌신이 중요한 법이다. 자신도 그러한 줄 알았다. 병사인 그에게 일이란 살육이며 열망은 승리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파괴에 헌신적으로 임했다. 노인이 남긴 마지막 열망을 읽어내고자 부수는 데 집중했다.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정착한 마을은 전직 인간 병기에 살육자에 불과한 떠돌이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그에게 역할을 주었고 애정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를 부수려는 시도는 용납할 수 없었다. 분노는 정체불명의 적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Cade, 생각해 보면 언제나 그것들이 문제였다. 그를 총알이 빚발치는 전장에 던져놓은 것도 그 자식들이었으며 살아갈 기회, 행복할 기회를 앗아간 것도 그들이었다. 선택은 그의 몫이었다. 잔인함! 그는 확실히 잔인했다. Cade는 그를 병기로 몰고 갔지만 쉬운 길을 택한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기억 속의 노병이 자신을 붙잡으며 열망이 어린 눈으로 광신에 빠진 듯 울부짖는 모습이 생각나자 끝 모를 자책감이 그를 엄습했다. 그는 자신이 노병을 얼마나 가차 없이 대했는지, 냉담하게 그의 최후를 지켜보았는지 떠올렸다. 노병의 마지막은 그에게 저주였다. 그의 인생은 노병의 망령에 사로잡혀 이제는 사라져 버린 그의 목적을 대신 이뤄주는 인형 그 자체가 되어버렸다. 손톱에 박힌 작은 가시가 사람을 미치게 하듯 노병의 최후가 두뇌를 뒤덮어 그를 괴롭혔다. 한동안 평화로운 일상에 젖어 그를 잊었지만 생사의 기로에 놓이자 그가 다시금 떠오른다.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시리도록 비참했다. 그 잔인하고 적나라한 미소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일평생 떠돌았지만 그도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싶었다. 짙은 고동색 눈이 그의 눈과 마주쳤다. 연민, 고뇌, 불안함이 그를 덮쳐 왔다. 오랜 시간이 지나 마주한 자신의 모습은 소름 끼치게 불쾌했다. 윤기가 흐르던 검은 머리카락은 빛바랜 회백색으로 먼지처럼 퇴색되었고 붉은 혈색이 감돌던 입술은 시든 장미처럼 검푸르게 바래있었다. 죄책감이 밀려왔다. 생명을 헛되이 밟아버린 지난날에 대한 후회, 잘못을 알고도 도망친 나날들, 무엇보다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고 파괴함이 지우지 못할 회한으로 밀려왔다. 그는 당장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다시금 창문을 힐끔 바라보고는 몸서리를 치며 들고 있던 물병을 던졌다.


"끔찍해."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단지에 울려 퍼졌다. 그는 방진 마스크를 장착하며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먼지로 가득한 무거운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과거의 망령들이 자신을 붙들고 있는 듯 몸이 무거웠다. 불쾌한 감상을 뒤로한 채 다시 수색에 집중했다. 그는 확실히 프로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사위가 고요해졌다. 생명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는 이 폐공장지대에도 자연이 깃들어 간간히 새가 지저귀는 소리나 쥐 따위의 작은 생물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심장 박동 소리가 귓가에 울리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오랜 전장의 감이 깨어나 인지하기도 전에 전투를 대비했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엄폐물에 몸을 숨겼다. 마을에 정착한 후 투여한 적이 없었던 약물도 주사했다. 동공이 확장되며 어두운 시야가 밝아졌다. 인지능력이 확장되어 주변 사물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이마와 등줄기에 한줄기 식은땀이 흘러 옷을 적셨다. 총을 거머쥔 손에 힘이 풀리고 긴장이 서서히 풀린다. 좋은 신호였다. 전투에서 긴장하는 것만큼 위험한 행위는 없다. 마약성 약물이 서서히 몸에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투여해서인지 효과가 빠르게 나타났다. 아스라이 비치는 달빛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은색 달빛에 비친 구름이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다 같은 붉은색은 아니었다. 어떤 구름은 검붉고 어떤 구름은 형광으로 빛났다. 꾸미는 데에는 도통 흥미가 없어 잘 모르지만 마을의 처녀들이 여러 가지 비슷한 색의 화장품을 들고 다니며 자랑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지금이라면 그 색을 전부 구별할 수 있을 듯싶었다. 갑자기 귓가에 파리가 윙윙거리며 날아들어왔다. 총기에서 손을 떼서는 안 되기에 그는 애써 모른 척을 했다. 감각이 점점 어지러워졌다. 건물들이 나풀거리는 먼지와 어우러져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날벌레 소리도 커졌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는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운 시점이 되어 불가피하게 이동하려는 순간 무언가 그를 덮쳤다.


탕! 탕!


고요한 주위를 총성이 깨웠다. 주변이 비명을 지르며 빠르게 달아났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그는 본능적인 감각을 발휘해 자신을 덮친 물체를 제압하려 했다. 그 물체는 제자리에서 모습을 빠르게 바꾸었다. 메뚜기 같기도 했고 새 같기도 했으며 파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혀를 깨물었다. 엄청난 고통과 함께 시야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주변에는 붉은 피와 금속 파편 등 전투의 흔적이 가득했다. 그러나 적은 보이지 않았다. 문득 허전한 느낌이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왼쪽 의수가 반쯤 잘려나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사태를 명확히 파악하기도 전에 무언가 그를 다시 덮쳤다. 맥없이 넘어진 그는 자신을 덮친 '그것'의 눈동자로 추정되는 부위를 바라보았다. 빨려 들어갈 듯 깊은 어둠만이 가득한 그곳에서 짙은 감정이 느껴졌다.


남자는 차오르는 눈물을 흐르게 두며 그것을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자신의 자폭 시퀀스를 작동시켰다. 아주 오래전 반란군의 장교였던 시절 사령부의 명령으로 뇌 속에 박아 넣었던 작은 폭탄이었다. 찰나가 영원이 된 듯한 느낌과 함께 몸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것 같았다. '그것' 또한 노인과 함께 터져나갔다. 마지막 순간에 그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노병을 다시 마주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을 구성하는 원자와 자신의 정신, 노병의 영혼 사이에 미묘한 연결성이라도 있는 것일까? 영혼의 몸부림이 원자의 진동과 맞물려 어떤 기적이라도 낳은 것일까? 그는 미소를 지으며 폭발하는 시야를 감상했다. 오묘한 만족감과 쾌감이 그를 감쌌다.


"하지만 나는 살아남았지."


남자, 아니 노인은 서서히 기철의 복면을 벗겼다. 오랜만에 빛을 마주해 눈이 시려 눈물이 맺혔다. 일렁이는 시야 사이로 의 모습이 보였다. 기철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키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반 정도 남은 얼굴은 끔찍한 화상을 뒤덮여 있었고 나머지는 기계로 대체되어 있었다. 새빨간 기계 안광이 기철을 뚫어버리겠다는 듯 날아들었다.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Cade 그 자식들을 가만 둘 수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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