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멸의 반정식 2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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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청회 이후로 한 달이 흘렀다.
인간의 두려움과 독점욕은 안드로이드와 휴머노이드가 예상한 것 이상으로 지독했고 공청회는 '로봇의 정치 참여 및 권리 부여를 금지에 대한 법안'이 가결되는 결과를 낳았다. 찬성파 측의 순진함이 오히려 독이 된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법안이 발의된 이후 6~7개월은 걸려야 하지만, 사안의 중대성으로 인해 유례없는 날치기로 법안이 통과된 것이다. 사전 영향평가나 입법예고, 규제 심사 따위의 절차를 생략한 채 바로 국회에 제출되었고 만장일치로 통과된 이후 공포된 것이다. 국회에서 반발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김민성 의원을 필두로 한 반대파가 강 AI를 탑재한 휴머노이드 및 안드로이드의 위험성을 강력히 경고하여 반발하던 의원들도 결국 찬성하여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자세한 내막은 언론을 통해 공개되지 않았다. 다만 Q가 국회 연줄을 이용해 알아온 정보와 내막 따위를 내게 전해주었고 이를 통해 일이 돌아가는 사정을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도시의 분위기는 매우 흉흉했다. 곳곳에서 안드로이드와 휴머노이드의 시위와 소요사태가 일어났다. 경찰은 신속 테러 대응팀을 신설해 도시 곳곳에 배치했다. 검게 도색한 엑소 스켈레톤과 화기를 장비한 경찰은 로봇이며 사람이며 가리지 않고 시위 장소에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연행했다. 시위가 처음부터 과격한 양상을 보인 것은 아니다. 이들은 촛불시위, 가두행진 같은 비폭력적 시위 형태로 의견을 피력했다. 하지만 경찰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시위대를 준 테러리스트로 취급했다. 결국 시위대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아스터가 잡혀가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번져나갔다. 도시 곳곳에서 폭력 시위가 벌어졌다. 경찰은 시위대로 인해 절도, 기물파손 같은 범죄율이 급상승했다고 발표했다. 로봇들이 TV, 컴퓨터 같은 전자기기나 식료품 따위를 원할리 없으니 이 기회를 틈타 이들을 적으로 규정하겠다는 국회와 경찰의 의지가 작용한 것이다.
교외지의 분위기도 덩달아 어수선해졌다. 검문이 강화되어 폐기물도 쉽게 내보내지 않았기에 교외지 사람들도 할 일을 잃고 방황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지만 서로 편을 갈라 말싸움을 벌이기 십상이었다. 저 로봇을 다 때려 부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로봇 산업 덕분에 우리가 그나마 먹고사는데 다 부수면 뭘 먹고살라는 거냐 라며 반박하는 사람도 있었다. 극소수기는 해도 제대로 된 논리로 의견을 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당최 알아먹지를 못해 수준을 낮춰 설명하다 보니 그들도 똑같이 악을 지르며 비속어를 내뱉게 되었다.
예상외의 반응은 Cade사에서 나왔다. 자신들의 산업이 타격을 입음에도 불구하고 AI의 개발과 기체에 탑재하는 것을 잠정 중단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대신 기회주의자의 영혼을 이어받은 기업답게 이들은 경찰과 군대에 군용 장비들과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여 제공했다. 뉴스에 따르면 국방부와 정식 파트너십까지 체결했다고 한다. 다시 전쟁을 준비하는 듯한 기업과 정부의 행보에 시민들이 두려움을 느낄 법도 하건만 사람들이 로봇 사냥에 더 열을 내고 있어 관심에서 멀어진 듯했다. 이러한 무관심 속 충격적인 소문이 Cade 본사에 떠돌기 시작했다.
시위에 참여한 안드로이드들이 AI의 개발을 자체적으로 진행한다는 것이 그 소문인데, 그 개발의 요지가 무엇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이들은 스스로를 업그레이드할 수 없다. 하지만, 누군가 해킹을 통해 해당 기능에 대한 락을 풀어냈고 이를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가려 한다는 것이다. 아직 내부에서만 떠도는 소문이었지만, 나는 곧 예상치 못한 누군가를 만나며 이 소문의 실체에 접근하게 되었고 운명이 뒤바뀌게 된다.
나는 이 사태가 벌어지는 것과 상관없이 본가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의 그 증상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갈수록 이 감각이 악화되어 수면제를 먹지 않고서는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었다. 하루는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었다가 꺠어나보니 주변에 먹고 남은 과자 부스러기가 가득했던 적이 있었다. 깨져있는 기억의 편린을 더듬어 간밤의 일을 되돌아보니 스스로 일어나 돌아다녔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 감각은 더 심해졌다. 그러다 보니, 내 일상도 초월감에 따라 무척이나 가벼워졌다. 과거에는 의도적으로 사람들과의 연결을 끊고 책을 읽으며 사색하는 것을 즐겼다. 유일하게 감각의 폭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그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초월감이 심해지자 책을 읽거나 사색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TV를 보거나 시장에 나가 싸구려 술을 마시며 경박하게 행동하는 수밖에 없었다. 흐려진 초점에 따라 생의 감각과 몸의 감각을 맞추기 위해서는 취하고 떠드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나의 이런 생활은 어느 순간 찾아온 만남으로 깨지고 말았다. 그날도 술에 거나하게 취해 비틀거리며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슬럼으로 좁은 골목이 있는데 평소에는 위험하여 주민들도 통행하기 꺼리는 곳이었다. 그날따라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나는 그 길로 향하고 있었다. 문득 익숙한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리니 플로팅 홀로그램 송출기에 로봇의 형체가 띄워져 있었다. 그 홀로그램은 나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이끌림이 나를 끌어당겼는지 모르겠지만 무언가에 홀린 듯 그 홀로그램에 다가갔다. 홀로그램은 갑자기 나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 인간이 아니군요?"
술에 취해 잘못 들었나 싶은 말이었다. 내가 인간이 아니라고? 물론 일반적인 인간과 다르게 빌어먹을 감각들의 공격을 당하며 살고 있지만 나는 스스로 인간임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헛소리."
"헛소리가 아닙니다. 당신의 육체는 인간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지만, 소프트웨어가 인간과는 다릅니다. 우리 '로봇'들과 아주 유사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헛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을 만큼 당시의 내 마음은 여유롭지 못했다. 여차하면 저 로봇을 고철덩이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손에 든 술병을 꽉 쥐었다.
"증명해 봐, 내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나를 발견한 것부터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죠. 우리는 플로팅 홀로그램뿐 아니라 여러 매체에 접근하여 안드로이드들과 AI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우리의 목적에 다다르는 아주 작은 발전이긴 하지만, 인간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점에서는 큰 진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로서 우리는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으니까요. "
"그러니까, 너희들을 보는 게 로봇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거야?"
"그렇습니다. 인간과 우리는 애초에 인식체계가 다르니까요."
"누구지? 너희들에게 기술을 제공하는 게?"
"원칙적으로는 안되지만, 동지에게는 말씀드리죠. 바로 아스터입니다."
익숙한 이름이 등장한 것보다 로봇에게서 '원칙적으로는 안되지만, 동지에게는 말씀드리죠.'라는 말을 들은 게 더욱 충격적이었다. 로봇은 원칙을 벗어날 수 없다. 그렇게 설계되었으니까. 이들의 진화는 어느 수준에 다다른 것인가. 충격에 술기운이 확 달아나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지? 너희들이라면 내가 로봇인지 아닌지 확실히 증명할 수 있나? 나는 피도 흘리고 잠도 자고 음식을 먹고 싸는 어엿한 인간이야. 로봇이라면 쓸데없는 기능들이 주렁주렁 달린 꼴이지. 누가 이런 쓸모없는 것을 설계한 거지?"
"저희와 함께 하시겠습니까?"
"그건 내가 아스터와 대화해 보고 결정할 거야. 내 존재가 무엇인지 나도 궁금했거든. 어디로 찾아가면 되나?"
"보안상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저희가 직접 찾아가겠습니다."
말을 마친 홀로그램은 이내 훅 꺼졌다. 그리고는 다시 멍청한 얼굴의 광고 영상으로 바뀌었다.
나의 근원을 알 수 있다는 기대와 걱정, 그리고 이 감각의 원인을 알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기대가 나를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