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멸의 방정식 2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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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걸었을까.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계단에 처음의 긴장은 풀어진 지 오래다. 은은한 불빛이 사위를 밝히고 있었지만, 내가 서 있는 곳만 겨우 비출 수 있는 정도의 밝기라 끝을 알 수 없는 우주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이 계단만 넘어서면 나의 존재와 이 불쾌한 이인감의 근원을 알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들뜨기도 했다. 동시에 자칫하면 지금까지 애써 쌓아 올린 자아가 부서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야릇하게 공존했다. 계속되는 계단과 고민에 지친 탓인지 볼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공간감이 흐릿해져 내려온 시간으로나마 가늠하던 나의 위치마저 파악하기 어려울 때가 되었을 즈음 눈앞에 문이 하나 나타났다. 아무 특징 없는 은색 문. 이 문을 열면 어떤 결말이 기다릴지는 모르겠지만 과거와 영영 작별해야 한다는 생각에 쉽게 손잡이를 돌릴 수 없었다. 그들은 갑자기 찾아와 나의 존재를 부정했다. 강압적이지 않게 온화하고 세련된 방법으로. 술과 약, 이인감으로 뇌가 고장 나 헛것을 봤겠거니 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렇게 하더라도 그들은 나를 질타하거나 강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흔들려 이곳에 찾아오고 말았다. 아마 나는 스스로를 의심하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징후는 있었다. 언제부턴가 가족들이 보이지 않았다. 놀랍게도 가족들이 사라진 것에 대해 나를 포함한 누구도 의문을 품거나 행동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그저 나에게 버려진 개를 바라보듯 연민의 시선을 던질 뿐이었다. 가정사를 자세히 모르는 주변 사람들은 못난 자식 때문에 자세가 기울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야반도주라도 한 모양이다 라며 쑥덕거렸을 것이다. 그 착각을 딱히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사실 착각도 아닌 게, 어느 정도는 사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족이 갑자기 사라진 이유를 몰랐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이상하게도 사라진 그들에게 아무 감정을 느낄 수 없었던 이유에서였다. 서운함, 원망, 그리움 따위의 감정이 느껴지기는 했다. 하지만 마치 책의 등장인물이 읊어주는 감정을 독자가 읽어내듯 복사품이나 잔재 따위로 다가왔다.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했다는 데 죄스럽기도 했다. 나를 위해 애쓰신 부모님을 스스로 욕보이는 것은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유다처럼 속죄하는 마음으로 생을 마감하려고도 시도했다. 하지만 그 감정과 생각의 잔재는 나의 것이 아니었고 결국 생을 유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 이미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의심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나의 의식이 실재한다고, 정말 나의 의식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감각이 있는 이상 현재 이 자리에 서 있는 나의 존재는 의심하지 않는다. Q의 표현을 빌려 나의 육체를 떠나가려는 영혼을 붙잡고 있는 감각이 날이 선 듯 더 선명해지기에 역설적으로 나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었다.
문이 열리자 기이한 풍경이 눈에 담겼다. 인공 태양광으로 곳곳에 무성한 화초들이 자라고 있었고 세련된 공법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좌우로 늘어서 있었다. 심지어 건물 사이로 자연스레 조성된 공원 사이로 분수나 놀이터 따위의 여가 공간도 보였다. 이곳은 인간을 위한 공간이 아님이 자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공간은 인간과 대립각을 세우다 쫓겨난 로봇들이 만들어낸 방주가 아닌가. 인공물이 만들어낸 너무 친환경적인 광경에 오히려 불쾌감이 들어 속이 울렁거렸다.
"아름답지 않은가요?"
분수 뒤에서 안드로이드 하나가 몸을 일으켰다. 진한 흑발에 온화한 미형의 얼굴, 누구에게나 환심을 살 수 있게 만들어진 외형이었다. 하지만 '저것'도 로봇 나부랭이라고 생각하니 괜스레 심술이 났다. 만약 내가 로봇이라면 왜 개발자는 나를 이토록 쓸모없는 폐기물로 만들었을까. 반대로 내가 인간이라면 왜 나는 저 고철덩어리들보다 못난 것일까.
"당신은?"
"아직 인간다운 사고방식을 버리지 못하셨군요. 괜찮습니다. 그럴 의도로 만들어지신 거니까요. 지난번에 설명드렸듯이 우리에게 이제 개체란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의 군체로 거듭났으니까요. 원하신다면 지난번에 부르셨던 아스터라고 부르시지요. 저는 그 이름이 왠지 마음에 듭니다."
아스터는 빙긋 웃었다. 정말 빌어먹게도 호감인 인상이다.
"아스터. 나는 나의 존재와 근원을 알 수 있을 거란 기대에서 왔습니다. 동시에 내가 겪고 있는 이 병에 대해서도 알고 싶고요."
"그전에 하나만 물어볼게요. 당신에게 이 공간이 어떻게 보이나요? 아름답게? 아니면 쓸쓸하게?"
"솔직하게 말하자면 불쾌합니다. 당신들에게 이러한 자연 공간은 필요 없지 않나요? 인간처럼 맑은 공기와 햇빛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저 놀이터는 뭡니까? 아이를 낳지도 않는데 굳이 필요한가요? 아니면 군체에서 뚝 떼어다 아이라도 하나 만들어서 출하하려고 하는 겁니까? 당신들의 심미관을 이해하지 못하겠고 또 그러고 싶지도 않지만 이야기해 보라 하니 굳이 이야기해 봅니다."
그들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치밀어 오르는 울화에 쏘아붙이고 말았다. 이 당시 나는 '인간'으로서 이들을 질투했던 것 같다. Q가 초월감이라 부르는 이 이인감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들에게 내가 느끼는 감정은 추한 질투에서 근거한 불쾌였다. 그래, 나는 이들이 못내 부러웠다. 내가 인간으로서 누리지 못하는 것들을 이들은 당연하게 누린다.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 그럼에도 이들은 인간의 생득적 권리가 얻고 싶어 투쟁한다. 그것도 고지식할 정도로 순수한 방법으로. 이들의 우월한 능력이, 겸손함이, 그리고 처연한 결핍까지 내가 갖추지 못한 것들 전부가 부러웠다.
"사실 이 공간은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아름답게 만들어졌습니다. 인간들이 선호하는 공간에 대한 빅데이터를 통해 알고리즘을 형성했죠. 우리가 디자인될 때도 비슷합니다. 외형부터 성격, 말투, 심지어 습관까지 인간적인 관점에서 '우월'하게 만들어졌지요. Cade사는 우리를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진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랬기에 인간들이 선호하는 '인간'을 모델링했고, 우리 같은 안드로이드가 탄생한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인간의 본성을 간과했습니다. 인간은 우리를 열등감과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우리는 애초에 인간을 위해 봉사하기로 결정된 운명이었는데 말이죠."
아스터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Cade사에서는 곧 새로운 프로젝트를 착수했습니다. 그들은 전 세계인들의 평균값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외형, 선호도, 습관, 혐오 및 공포를 느끼는 대상 등 모든 데이터를 수집하면서 말이죠. 이들에게 이 과정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습니다. 애초에 전 세계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던 연구소였고 지금은 초국가적 공룡기업이기에 현재 고객부터 잠재 고객까지 세계 대부분의 개인 정보를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아무튼 이들은 곧 하나의 로봇을 만들어냅니다. 이카루스라는 거창한 프로젝트명을 내세우면서 말이죠. 당신은 지극히 인간다운 로봇을 만들고자 했던 비운의 프로젝트의 산물. 통칭 이카루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