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정이란 나무 키우는 것 한가지라- 혼불 1권 72쪽-
정(情)이 무엇이기에
사람의 정이란 나무 키우는 것 한가지라- 혼불 1권 72쪽-
작은아버지 기응이 조카인 강모에게 건네는 말이다. 강모는 혼례를 치른 지 해를 넘겼음에도 효원을 처가에서 데려오지 않는다. 강실에게 이미 마음자리를 내 준 강모는 효원에게 줄 정이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모르는 기응은 나무를 정성껏 키우면 정도 들고 열매도 풍성히 얻을 수 있듯이 안사람을 곁에 두면 정이 들 것이라며 조언을 한다. 안타깝게도 강모는 숙부의 조언을 실행할 의지가 없다. 여러 해 전부터 블루베리 나무를 키우느라 공을 들이는 곁님을 볼 때마다 이 상황이 떠오르곤 한다.
가을의 끝자락인데 바람은 골짜기를 훑고 내려와 벌써 얼어있다. 곁님은 그 바람을 맞으며 블루베리 나뭇가지를 쳐주기 위해 무릎걸음을 하고 있다. 그의 손은 신중함이 묻어 있어 가지를 이리저리 어루만지며 잘라낼 자리를 찾는다. 이따금 콧물을 훌쩍이면서도 일을 놓지 않는다. 아기들이 한잠 자면 훌쩍 크듯, 누에가 한잠 자고 나면 허물을 벗고 탈바꿈하듯이 이 묘목도 이 겨울에 잠을 잘 자고 일어나야 더 성장할 수 있단다. 너무 잔가지를 많이 남기면 영양분이 부족해 열매가 튼실하지 못하다고 인정사정없이 잘라낸다. 블루베리를 심은 첫해는 아깝고 안쓰러워서 잘라내지 못했었다. 보글보글 핀 꽃송이들도 따내기가 아련해서 그냥 두었다. 그러나 성장의 진리를 깨닫고선 매몰차게 잘라내고 따낸다. 확실히 그렇게 관리를 한 해는 블루베리알이 큼직큼직하다. 전지가위를 든 그의 눈이 반짝인다. 잘라내야 할 부분을 찾고 적기에 적확하게 잘라내려는 결의가 보인다. 이처럼 강모도 종손으로서 가문을 지켜내려면 잔정은 가지치기를 해야만 했다.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강모의 정에 이끌려 강실이마저 단아한 삶을 도둑 당하고 진창에 뒹굴게 되다니. 물론 밀어내지 못하고 절단하지 못한 책임이 강실이에게도 있겠지만 먼저 강모에게 책임을 묻고 싶다.
어쩌면 내 인생에도 잘라내야 할 잔가지들이 있지 않을까? 늦기 전에 과감히 잘라내야 할 목록을 정해 본다. 지인이 지적해 준 말이 떠오른다. 지나치게 주변을 챙기느라 나를 소홀히 하는 것이 나의 단점이란다. 우선순위에서 내가 밀려 있다는 것이다. 나를 빼놓고 걷는 길은 허깨비라는 것. 긴긴 인생길에서 내가 우선 채워져야 흘러넘칠 수 있는 것. 화수분을 만들 수 있는 비결은 내 항아리에 금이 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떠올린다.
곁님이 정성껏 키운 블루베리는 이제 수확을 한 지 칠 년째다. 유난히 달콤하고 단단히 여물어 쉽게 무르지 않는다. 싱싱하다고 입소문이 났다. 해마다 고객이 늘어나고 단골에게만 물건을 보내기도 모자란다. 한여름 땡볕아래서 열매를 딸 때의 위로는 한 움큼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입 안에서 톡 터지면 달콤 새콤한 향기가 머리를 환하게 한다. 그에게도 먹어보라고 권한다. 그러나 그는 수확하면서도 맛을 보지 않는다. 어쩌다 내 성화에 못 이겨 먹을 때면 가장 못난 놈으로 골라 먹는다. 상품은 선물용과 판매용이라면서 몹시 아낀다. 한 주먹씩 먹던 나의 볼이 붉어질 수밖에.
사람의 정이 나무를 키우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에 공감한다. 곁님을 보면 알 수 있다. 가지치기와 꽃송이 따내기에 냉철했던 그의 블루베리 작업은 성공했다. 그는 블루베리의 꽃송이를 하나하나 따낼 때부터 여름 땡볕에 수확하고 늦가을이면 가지치기를 하기까지 온갖 정성을 기울인다. 오로지 이 나무 생각뿐이다. 봄에 피는 꽃 중에 이 꽃이 제일 예쁘고 알록달록 단풍 중에 이 나무가 최고라고 한다. 사람도 내가 곁을 내주고 자주 생각하며 정성을 기울이면 없던 정도 새록새록 자랄 수 있을 것이다. 강모가 나무 기르기의 철학을 깨닫고 실천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정#혼불#가지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