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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눈길이 그리워

by 아침햇살


잠포록한 날씨다.

몸살을 앓던 하늘이 아직 개운하게 일어서지 못하고,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한나절을 살고 있다. 겨울 해도 얼어붙었는지 눈을 못 뜨고 종일 덜덜 떨다가,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엊그제 밤에 살짝 내린 도둑눈은 첫눈이 아니라고 우기던 딸아이 말이 떠오른다.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

오늘 눈은, 딸도 인정할 수 있는 첫눈일 것이다. 내일 아침, 모악산을 걸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눈이 오면 으레 숫눈길을 걸으려고 이른 새벽부터 부지런을 떨곤 했다. 그런데도 항상 우리보다 앞선 발자국을 발견하게 되고, 우리처럼 숫눈길을 좋아하는 누군가가 있음에 다소 섭섭하면서도 동행의 설렘이 차오르곤 했다. 그가 걸어간 길을 따라 한 발자국씩 옮기며, 이이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상상하면 발걸음이 가벼워지기도 했다.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 즉 숫눈길을 좋아한 것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의 등에 업힌 유일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산 밑에 있던 작은 집에서 제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눈이 쌓여 있었다. 작은 도랑을 건너 집으로 오는 300미터 남짓한 거리에 불과했지만 지금까지도 눈 오는 밤이면 여전히 그 길 위에 서 있는 느낌이 드는 길이다.

자정이 넘은 적막한 공기를 묵직하게 가르는 소리가 있었다. 봉황산 상수리나무 숲에서 부엉이가 부우어엉 부우어엉 울었다. 겁에 질린 나는 아버지의 등에 업힌 채 덮어준 외투 속에 고개를 묻었다. 아버지의 등은 넓고 따뜻했으며, 부엉이 울음소리도 침범할 수 없는 곳이었다.

사그락사그락, 아버지가 밟는 발자국 소리가 부엉이 울음을 잠재웠다. 발목까지 쌓인 눈길이 위험하다며 아버지는 보폭을 좁히면서 먼저 걸었다. 동생을 업은 엄마에게 당신의 발자국을 따라오라 하셨다. 큰오빠가 이른 새벽에 외궁까지 걸어갈 때가 있었다. 먼저 이슬받이 해주시던 엄마처럼 아버지는 성큼성큼 걸어가셨다.

엄마에게 길을 빌려주시고, 나에게는 등을 빌려주신 아버지. 그 추억꽃이 피어 있는 숫눈길은 항상 나를 들뜨게 한다.

“사그락사그락.”

눈길 위에서 발자국을 남기며, 어린 나와 아버지, 그리고 그때의 세상이 내 안에서 또렷이 살아난다. 숫눈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다. 추억과 사랑이 쌓이는 시간, 그리고 온기를 배운 교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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