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리사랑과 치사랑

2024.11.25 ~ 2024.12.01

by 휘슐랭

저번 주말에는 할아버지의 아흔 번째 생신을 맞아 친척들이 방문했다. 예전에 비해 모여드는 친척들의 수는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평소보다 바글바글한 분위기는 여전히 정겹다. 이제 막 말을 따라 하기 시작한 5촌 조카는 귀여움을 마이크 삼아 모임의 분위기를 주도했다. 작은 몸짓 한 번에 모두를 웃게 만들 수 있는 지금이 인생의 첫 번째 황금기가 아닐까 싶다. 나를 포함한 가족 모두에게 무조건적인 내리사랑을 받는 조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치사랑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 치사랑: 손아랫사람이 손윗사람을 사랑함. 또는 그런 사랑.


우리 집은 3대가 같이 사는 요즘시대 기준 대가족이다. 내가 8살 때부터 쭉 같이 살았으니, 약 23년 정도 대가족으로 지내온 셈이다. 심지어 10살 까진 증조할머니도 함께 4대가 같이 사는 대가족이었던지라 어릴 때부터 많은 가족 구성원들에게 넘치는 내리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 특히 부모님이 맞벌이를 시작하면서 나의 하교 후 낮 시간은 조부모님이 더 큰 사랑으로 돌봐주셨다. 그때 조부모님이 주시던 사랑이 얼마나 큰 사랑이었는지는 성인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지금도 그때와 같은 크기의 사랑을 받고 있음에 새삼 감사드린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 내가 느끼는 감사함의 절반도 표현하지 못한다. 역설적이게도 내리사랑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어린 시절의 나보다 조부모님의 사랑을 깨달은 지금의 내가 감사함을 표현하는데 더 어려움을 느낀다. 참 아이러니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기 전 엘리베이터에서 '오늘은 조금 더 살갑게 대해드려야지' 항상 스스로 다짐을 하며 집에 들어가지만, 조부모님에 대한 나의 태도가 다시 귀찮음과 짜증으로 되돌아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으시니 같은 질문이 수차례 날아들고, 귀가 안 좋으시다 보니 같은 대답을 반복해야 한다. 되짚어 생각해 보면 두어 번 더 말씀드리면 될 일인데, 뭐가 그렇게 귀찮고 짜증이 났을까 싶다. '조금 더 좋게 말씀드릴걸...' 하는 후회는 금방 찾아오고, '내일은 조금 더 살갑게 대하지 뭐'하는 생각으로 후회를 지워버린다. 이런 패턴이 지속되다 보면 언젠가 지울 수 없는 후회로 굳어버린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쉽게 개선되지 않는다.


원래 치사랑이란 내리사랑보다 어려운 것일까? 부모님께 살갑게 잘하는 주변 친구들을 보면 꼭 그런 것만 같지도 않지만, 그들 또한 부모님께 받은 내리사랑의 크기를 넘어선 치사랑은 힘들거라 생각한다. 물론 내리사랑을 넘어서는 치사랑이 원래 힘든 거라며 합리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치사랑이 내리사랑보다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에 대해 고찰함으로써 스스로 후회와 죄책감의 굴레에 빠지는 걸 방지하고 싶다.


치사랑이 내리사랑보다 어려운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익숙함과 소중함의 차이'가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 어떤 사람도 부모의 탄생을 지켜본 사람은 없다. 부모에게 자식은 누군가가 내려준 소중한 선물이지만, 태어난 자식의 입장에선 부모는 처음부터 있던 당연하고 익숙한 존재다. 심지어 사람은 성장할수록 어린 시절의 기억은 지워지고, 당연함과 익숙함이 짙어질수록 소중함과 감사함은 옅어진다. 하지만 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을 받은 날이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잊혀질까?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부모가 바라보는 자식은 언젠가 찾아온 인생에 가장 큰 선물이지만, 자식이 바라보는 부모는 당연하고 익숙한 존재인 것이다. 그 차이가 상호 간의 사랑이 동등한 균형을 이루는 것을 방해한다.


내리사랑과 치사랑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는 치사랑의 크기가 내리사랑의 크기보다 작다는 것을 인정하고, 모자란 부분을 채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내리사랑보다 더 큰 노력이 가미되어야 하는 것이다. 노력을 통해 사랑을 완성하는 것이 아닌, 모자란 부분을 채우기 위한 노력의 과정 중에 사랑이 성장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오늘도 집에 들어가기 전 엘리베이터에서 똑같은 다짐을 하겠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평소보다 더 굳센 다짐을 가지고 집에 들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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