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병원에서 맞이해 떡국도 못 먹고, 속상한 동글이에게 기분 좋은 일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마침 디즈니 영화 '위시'가 상영 중이었고
동글이와 가까운 극장에 가서 사랑해 마지않는 캐러멜 팝콘을 먹으며,
감동의 눈물을 흘려가며, 영화 감상을 끝마치고 오는 차 안이었다.
평화주의자 동글이는 주인공의 고난과 역경을 지켜보는 것을 어릴 때부터 힘들어했는데,
주인공 아샤가 매그니피코 왕이 놓은 덫에 걸려 큰 위기에 봉착했지만,
그런 고난과 역경에도 포기하지 않고 결국 해냈다는 것에,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고 감상평을 전했다.
동글이도 지금 이런 상황(부모의 이혼, 할아버지의 투병 생활)들이 힘들지만, 포기하지 않고 지나 보내면 좋은 일들이 올 것이라 얘기해주고 싶었는데, 운전에 집중하느라, 타이밍을 못 잡고 있었다.
집에 거의 다 왔을 때, 동글이가 갑자기 제 아빠 이야기를 꺼냈다.
동글이도 어쩌면 같은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동글이는 아빠가 보고 싶다고 했고, 나는 언제 보러 올 수 있는지 연락해 본다 했다.
"엄마, 근데, 엄마랑 아빠는 왜 이혼한 거야? 싸우지도 않았잖아."
(나와 전남편은 동글이 앞에서는 절대 언성을 높이지도, 말다툼을 하지도 않았다.
동글이 앞에서만큼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주 웃었고,
그렇게 자주 웃었더니,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어쩌면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동글이가 부모의 이혼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더뎠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음.. 나중에.. 동글이가 조금 더 커서, 이해할 수 있게 되면 그때 얘기해 줄게."
분명, 나는, 조금 더 커서, 이해할 수 있게 되면 얘기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가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분명.
그런데, 나는 몇 분 뒤, 무슨 생각이었는지, 뱉어버리고야 말았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집으로 올라가려고 가방을 챙기는데, 울먹이는 동글이를 발견했다.
계속 아빠가 보고 싶다는 마음 때문에 슬픈 것 같았다.
"엄마~, 근데~ 우리~ 아빠랑 다 같이 평창 가고 싶다."
"그러게~. 동글이 아빠랑 여행 가고 싶구나~. 그렇게 되면 좋겠다.
근데, 거기에 엄마는 이제 같이 못 갈 것 같아."
"왜? 이혼해도 같이 여행 가고 그럴 수 있다고 했잖아."
"동글아, 엄마랑 아빠가 이혼을 했잖아. 근데, 아빠한테 여자친구가 생겼어. (새 아내가 생겼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동글이 학교에서 **이랑 &&이가 사귀다 헤어지고, **이가 또 $$이를 사귀는 거랑 비슷한 건데~ 어쨌든 동글이랑 아빠랑 만나는 건, 아빠가 딸을 만나는 거니까 여자친구가 괜찮다고 하겠지만, 아빠가 엄마를 만나는 건, 그 여자친구 입장에서는 기분 나쁠 수도 있거든. 그래서 엄마는 같이 여행 갈 수가 없어."
"그럼 같이 밥 먹는 거는?"
"글쎄,, 그건, 아빠랑 얘기해 봐야겠지?"
오 마이 갓.
무슨 생각이었을까.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냥 엄마랑 아빠랑 잘 안 맞아서 이혼했어."라고 하면 될 질문에 대해서는 크면 얘기해 준다고 하더니,
아빠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말을 이제 막 열 살이 된, 아이 앞에서 뱉어버리다니.
내가 돌았다, 돌았어.
후회해도 늦었다.
뱉어버린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다.
'위시'를 보며 기분 전환을 해 주고 싶었는데,
힘든 아홉 살 잘 보내주어 고맙다고, 열 살은 우리 행복하자고,
그 시작에 오늘을 행복한 날로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열 살이 되자마자 겪는 불행한 날로 만든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집에 올라온 동글이는 쭉 시무룩해서는 그 좋아하는 1박 2일도 안 보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에 들어가서 시무룩한 동글이를 초콜릿으로 유혹해 달래니 이런저런 얘기를 꺼낸다.
(언젠가에도 얘기했듯 초콜릿은 우리 둘만의 기분 전환 방법이다.
달콤한 초콜릿을 한입에 쏘옥 넣고 물고 있으면 그 달콤함이 스르륵 온몸으로 전해진다.)
"엄마, 아빠는 왜 엄마 말고 다른 여자친구가 생긴 걸까?"
"근데 엄마, 아빠 여자친구가 엄마를 닮았으면,, ㅎㅎ 그건 진짜 웃기겠다."
"엄마, 아빠가 그 아줌마(아빠 여자친구)랑 얼른 헤어지고, 다시 우리 가족으로 돌아오면 좋겠다."
그러다가 얘기했다.
"엄마, 근데, 그냥 비밀로 하지 그랬어. 쫌 나중에 얘기해 주지..."
부모의 이혼을 받아들이는 것도 버거운 만 8세 어린이에게,
나는 아빠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더 버거운 말을 해버렸고,
만 8세 어린이는 그 버거운 사실을 나중에 알았으면 좋았겠다고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이후 기분이 풀려 함께 1박 2일을 보며 밥을 먹었는데,
나는 밥이 잘 넘어가지도 않았고, 잠이 오지도 않았다.
왜 그랬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왜 그때 그 타이밍에 그런 얘길 했을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아빠의 여자친구에 대해 물어보면 뭐라 답해야 하나.
수많은 고민들로 밤을 새웠지만,
동글이는 만 8세 어린이답게,
또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척, 대수롭지 않은,
열 살의 나날을 보냈다.
그렇게 제 아빠를 보지 못하는 수많은 날들이 지났다.
새 학년이 되고, 아빠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나날 속에 동글이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동글이와 나는 자기 전에 "잘 자, 사랑해~"로 시작하는 그날 있었던 고마운 일들에 대해서 얘기하는 수면 전 루틴이 있다.
"엄마, 다음 생에는 아빠랑 이혼하지 마.."
자기 전 동글이가 "잘 자, 사랑해."이후에 한 말이다.
샤워 후 아빠 보고 싶다고 시무룩해 있다가 자려고 누워한 말이..
다음 생엔 아빠랑 이혼하지 말라니..
받아들였구나 싶었다.
아프지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동글이는.
부모의 이혼을.
가슴 아픈 사실이지만,
나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준 동글이가 대견했고, 기특했고,
눈물날만큼 고마웠다.
그즈음 동글이는 아빠가 집에 오는 꿈을 자주 꾸었다.
자고 일어나면 눈물을 머금은 채로, 한껏 아기 목소리로 옹알대며 꿈 내용을 얘기하는데,
그 눈을 보고, 그 목소리를 듣자면,
이 작은 아이에게 내가 얼마나 큰 아픔을 지게 한 건지,
아침부터 가슴이 미어져 하루 내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날 꿈속에서 아빠는 빵을 사 왔다는데, 한입 한입 아껴먹으라고 했단다.
그래서 2주 동안 아껴먹었더니 안에서 작은 쪽지가 나왔고,
거기엔 다음에 만날 약속이 적혀있었다고 했다.
동글이는 이번엔 엉엉 울지 않았다.
눈물을 또르르 흘리며 "엄마, 나를 위로해주지 말고, 이해해 줘."라고 했다.
내 작은 천사가 이해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작은 천사의 마음을 100%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아빠가 있었고, 지금도 편찮으시지만 우리 집에 아빠가 계신다.
"아빠!"라고 부르면 "응."하고 대답해 주는 아빠가 있다.
나의 작은 천사 앞에서 나는, 그러한 연유로 아빠를 아빠라고 부를 수가 없다.
할아버지!이다.
아빠가 보고 싶은데 볼 수 없는, 이 동글이의 마음을 나는...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다만, 내 마음도 같이 아플 뿐이다.
(미안해 동글아..
엄마가 너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어서...)
언젠가는 아빠가 보고 싶다고 울다가
"엄마가 한 일들이 나는 다 아주 좋은데, 아빠랑 이혼한 건 안 좋은 일이야."라고도 했다.
동글이가 아빠 얘기를 한동안 꺼내지 않았을 때는 아이가 혹시 혼자 참는 건 아닌지 걱정이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