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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달 Aug 23. 2024

전 시아버님의 고백

저는 꽃입니다.

"너는 꽃."


이혼 후 전 시아버님께 문자가 왔다.


"너는 꽃~"으로 시작되는 시를 보내주셨는데,

(쉽게도 지금은 핸드폰이 초기화되어 문자를 볼 수가 없다...)

나는 향기로운 꽃이고, 오래도록 피어있을 꽃이라는,, 내용이었다.


"너는 꽃"이라니..

전남편에게도 못 받아본 향기로운 고백을,

전 시아버님께 받았다.

그 문자가 마치 연서라도 되는 냥, 핸드폰을 가슴 깊이 끌어안고

시를 되뇌다,

감사한 마음과 죄송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답을 보냈다.


무슨 시일까?

아무리 검색해 봐도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버님께서 나를 생각하며 직접 지으신 자작시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나는 전 시아버님을 좋아했다.

멋진 분이셨다.


생활의 달인 섭외가 들어올 만큼 하시는 분야에 최선을 다 하셨고, 그만큼 달인이셨다.

당신이 하시는 분야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 일가견이 있으셔서, 이 일 저 일, 모르는 분야가 없으셨다.


하시는 일이 몸이 힘든 일이시라,

매일 약주를 하셨는데,

(이제 조금 줄이세요. 이제 저는 며느리가 아니지만, 그래도 아버님 건강은 늘 걱정입니다.)

그럼에도 산책, 등산 등 건강을 위한 운동들을 꾸준히 하셔서,

허리 디스크를 제외하고는 건강하신 분이셨다.


글씨도 어쩜 그리 멋들어지게 쓰시는지,

내 글씨체를 보시며 아이들 글씨 같다고, 어른이 되었으니 어울리게 글씨 연습도 해야 하는 것이라 하셨었다.


바둑을 좋아하시고, 집중력이 좋으셔서,

바둑 티브이를 보고 계실 땐,

손녀가 아무리 불러도 못 알아채셔서 손녀가 서운해했던, 이제는 그리운, 그런 일들도 있었다.


시아버님을 처음 뵌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여자친구로 전남편 집에 처음 인사를 간 날, 아버님께서는 장례식장에 다녀오시며 햄버거를 가득 사 오셨다.

"아버지가 많이 취했지이~" 하시며 햄버거 봉투를 건네시던 그 무심한 다정함을 나는 내내 잊을 수 없었다.


임신을 했을 때,

어머님께서 다 문드러져 싸게 파는 딸기를 사 오셨을 때,

아버님께서는 체리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어머 몰래 비싼 체리를 사 주셨다.

맛있는 것을 사 주고 싶은데, 주변에 갈빗집밖에 없다며, 매주 양념갈비를 사 주셨다.

(동글이가 그래서 양념갈비를 좋아하나 보다.)

친정엄마가 보내 주는 음식이나 명절 선물에, 감사하다고 먼저 말씀하시는 것도 아버님이셨다.

"당신도 뭐 하나 사서 보내~"라며 시어머니께 넌지시 말씀을 하시기도 하셨다.


아버님은 당신 하시는 일이 작다고 여기셨지만,

나는 아버님 하시는 일을 존경했고,

아버님의 무심한 다정함을 감사히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전 시어머니와 전남편에게는 서운한 일들이 많았지만,

전 시아버님과 아가씨들에게는 고마운 일들이 더 많은 결혼 생활을 했다.


전남편은 전 시아버님께 가슴으로 낳은 자식,

아가씨들은 전 시어머니께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니,

어찌 보면 내게 가지는 마음들이 달랐을 테고,

나 역시 다른 마음들로 대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들이 최고인 시어머니는

아가씨들에게 "꼭 오빠 같은 사람만 데려오라." 했었는데,

그 얘길 들으며 나는 혼자 '절대 오빠 같은 사람만 데려오지 마세요. 바람만 안 피우면 돼요.'라고 생각했다.

시어머니의 지론은 "오빠가 하는 말은 다 맞는 말이니, 너희가 새겨 들어라."였다.

전남편에게는 '이놈, 저놈'하는 일이 없지만, 아가씨들의 호칭은 자주 '이년, 저년'이었는데 (애정의 표현인 것은 알겠지만, 애정의 표현으로 아들에게는 그런 말을 쓰지 않으셨다.) 내가 아가씨들이었다면 많이 서러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남편은 혼날 짓을 해도 시어머니께 절대 혼나지 않았는데, 아가씨들이 타박받는 모습은 자주 목격되었다. (이 역시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 마음에서 기인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아들은 자신이 왜 그렇게 했는지 합리화하여 설명하고, 시어머니께서 이 합리화에 넘어간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차별받는 아가씨들이 안쓰러웠다.

이 안쓰러움이 같은 '여자'로서 느끼는 안쓰러움인지, 같은 '남의 자식'으로서 느끼는 안쓰러움인지.

둘 다 일지도 모르겠다.


신혼 때 "내 아들 집에 내가 가고 싶어 간다는데 니들이 왜 난리냐." 하시며 자주 신혼집에 찾아오시던 시어머니께 막내 아가씨는 "엄마, 거긴 오빠 집이 아니라, 언니 집이기도 하지!!!"라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기도 했다.

중학생이었던 막내 아가씨는 어느덧 서른이 되었고, 주변에 친구들이 결혼을 하고, 시댁 욕을 하는 것을 들으며,

"언니, 언니는 진짜 너무 착한 것 같아요. 어떻게 엄마가 자주 집 찾아가고, 매주 여기(시댁) 오고, 그걸 어떻게 했어요~ 애들이 맨날 하는 시댁 욕이 다 우리 엄마가 했던 거더라고요~" 했다.


첫째 아가씨의 상견례 즈음 전남편이 첫 번째 외도를 했는데, 그 비밀이 나의 입에서 새어 나올까 봐 나는 시댁 식구들 앞에서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혹여라도 취해 실수를 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를 모르는 첫째 아가씨와 시매부는 함께 모여하는 술자리가 다 끝나고 멀쩡한 정신으로 뒷정리를 하는 내게 '진짜 최강자'라고 하기도 했었다.

시어머니께 효(孝)를 행하기 위해 (마음에서 우러나온 효 + 전남편에게 밉보이지 않기 위한 효) 여러 노력을 했는데, 이 모습을 보고 첫째 아가씨는 "언니, 저는 시어머니가 있지만, 절대 언니처럼은 못할 것 같아요."라고 하기도 했다.


(쓰고 보니 내 자랑이 된 아가씨들 자랑이다.)

나는 나를 지지해 주는 아가씨들 덕에 결혼 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





전 시아버님의 문자 한 통으로

나는 나의 전 시댁 식구들의 모습을 돌아보고, 감사하게 되었다.


10년.

10년 동안 우리는 가족이었다.


사라진 첫째 아가씨를 찾아 온 가족이 새벽까지 뛰어다니기도 했고,

명절 때마다 큰 댁에서 일찍 집에 오고 싶어서 눈짓을 주고받기도 했고,

평창에 별장을 지어 마당에 텐트 치고, 불멍도 때리고, 술판을 벌이기도 했고,

생일, 생신 때마다 모여 축하하며 밥을 함께 먹기도 했고,

서로의 대소사를 걱정하고 함께 하던,

가족이었다.


나는, 이혼으로 인해, 이런 가족을 잃었다.


그래도 나는, 나의 가족이었던 이들이 모두 건강하고 평온하고 행복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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