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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달 Aug 30. 2024

육각형 인간은 없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트렌드 코리아 2024에는 '육각형 인간'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육각형 인간이란 외모, 집안, 직업, 자산, 학력, 성격의 6가지가 결혼 배우자로서 완벽한 조건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조건을 더한다면, 팔각형, 십각형까지도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왜 여기서 '육각형 인간'을 얘기하냐구요?

이혼했으니, 이제 재혼을 생각하냐구요?

재혼 배우자로서 육각형 인간을 찾느냐구요?


천만말씀, 만만 콩떡.


그러니까 육각형 인간이란, 완벽한 인간을 말하는 건데,

그런 인간은 애초에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도형은 있을 수 있지만,

완벽한 인간이란 있을 수 없다.



네 변의 길이가 같고 내각의 크기가 모두 같은 사각형을 정사각형,

여섯 변의 길이가 같고 내각의 크기가 모두 같은 육각형을 정육각형이라 부른다.

하지만 세상에는 정사각형만 있는 것도, 정육각형만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사각형도, 그냥 육각형도 존재한다.

사각형도 아닌 것, 육각형도 아닌 것도 존재한다.


나는 이 '육각형 인간'의 각 꼭짓점을 조건이 아닌 역할로 바꾸어 생각해 보았다.

나에게는 여러 역할이 있다.


엄마로서의 역할, 딸로서의 역할, 교사로서의 역할,

이혼 전에는 아내로서의 역할, 며느리로서의 역할이 더 있었고,

마지막으로 나로서의 역할.

(물론 세분화하면 더 많은 역할이 존재하지만 굵직한 것들만 생각해 보았다.)


이 역할을 꼭짓점으로 두고 이 역할에 모두 완벽하여 각 변의 길이가 같고, 내각의 크기가 같은 정육각형을 이루었을 때,

이런 사람을 육각형 인간이라고 한다면, 그런 인간이 실제로 존재할까?


완벽하려 애썼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MBTI에서 파워 J형 인간으로 일의 순서나, 집안이 정리정돈 되어 있는 것을 선호한다.

동글이를 낳고

모유수유도 , 아이의 잠투정도, 뭐 하나 아는 것도 없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 육아의 세계라는 것을 체감하던 시절이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으니 파워 J는 예민했다.

그 와중 시댁 식구들은 동글이를 보고 싶어 하셔서 주 3회는 집에 오시던 그때.

동글이가 낮잠을 자면 정리를 하고,

동글이를 안고 청소기를 돌렸고,

동글이를 업고 설거지를 했다.

틈틈이 그렇게 해도,

온 집안은 아이의 장난감으로 어질러져 있고,

빨래를 개어 놓을 틈도 없고, 설거지는 싱크대에 쌓여있는 모습을,

시어머니께 보이기 싫어 파워 J는 시댁 식구들이 오신다는 연락을 받으면,

미친 듯이 청소를 했다.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했다.

동글이가 울 땐 안아 달래주시지는 못하고, 젖 물려라 하시면, 모유수유가 맘대로 안 되던 파워 J는 힘들었다.

"내일 몇 시에 가겠다."가 아니라 "지금 출발한다." 하시면 부랴부랴 준비를 해야 했던, 파워 J는 예민했다.

(그나마도 조동 언니 중에 시어머니께서 비번을 누르시고 들어오신다는 분이 계셔서 위안이 되었다.)


그래서 싫었다.

시부모님의 방문이.

그것은 내 얼굴그대로 드러났을 것이고,

전남편은 전남편대로 내 눈치를 살폈을 것이다.


그러다 전남편이 첫 번째 외도를 했고,

1번 상간녀가 전남친 부모님께 어떻게 했는지 그 얘기를 들으며,

나를 반성했다.


집안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시부모님이 오시는 것을 싫어하지 않으려면, 집안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바꾸어야 했다.

그래서 완벽하지 않으려 애썼다.

완벽한 며느리란, 집안 살림을 깔끔하게 잘하는 며느리가 아님을 알았다.

청소, 빨래 그런 것쯤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뭐~' 하는 마인드로 살되,

시어머니께는 전보다 훨씬 잘하려 했다.

그러다 보니 주변이 어질러져 있어도, 그런대로 괜찮았다.

가끔은 어머님께서 오셔서 빨래를 개어 주셨는데, 웃는 얼굴로 "제가 해야 하는데, 감사합니다~"하기도 했다.


완벽하려 애쓸 때보다, 완벽하지 않으려 애썼더니 더 편해졌다.


이를 또 한 번 느낀 것은, 이혼 후였다.


나는 착한 딸이었고,

부족한 것 없이 다 해주고 싶은 엄마였고,

학생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잘하고 싶은 교사였다.


나는 이 역할들을 모두 다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고,

그럴 수 없는 나 자신이 한심했고, 답답했고,

그러다가 '나'를 잃었다.

큰 문제였다.


착한 딸은 아빠가 원하는 것, 엄마가 원하는 것을 다 해 드리고 싶었다.

아빠가 힘드실 때 다리를 몇 시간이고 주물러 드리고 싶었고,

엄마가 잠 못 주무시니 육퇴 후 밤늦게 누군가 만나거나 취미 생활을 하는 것은 자제하고 싶었고,

엄마가 매일 같은 내용의 하소연을 할 때 그것을 들어드리고 싶었다.

어려운 일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일들이 끝을 알 수 없게 반복되고, 나는 이 역할에만 머무를 수는 없으니,

속이 울렁거리게 답답했다.

아빠 엄마와 대화할 때, 동글이는 질투를 했고, 나를 원했다.


이런저런 연유로 착한 딸 역할만 하는 것은 그만하기로 했다.


아빠가 힘드실 때 다리를 주물러 드릴 수는 있지만, 

아이가 나를 필요로 할 땐, 달려갔다.

내가 할 일이 있을 땐, 내 할 일을 먼저 하기도 했다.

엄마가 잠을 못 주무시지만 육퇴 후 시간은 온전한 나의 시간으로 하고 싶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미등을 켜고 책을 보고, OTT 드라마도 봤다.

엄마의 하소연을 듣고 있지만 가끔 엄마에게 이제 그만 미워하고, 그만 절망하라고 쓴소리도 한다.

미움의 대상이 어찌 되었든 내 아이의 아빠이고, 그 마음을 듣고 있자면 나조차도 숨이 막히고, 미움은 엄마 자신을 깎아 먹기만 할 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미움의 감정이 들 수는 있지만, 충분히 미워했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죽을 때까지 미워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셨다.

엄마가 죽어야만 이 감정이 끝날 것 같이 괴롭다 하셨다.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누가 동글이에게 그랬다면 같은 마음이 들 것이다.)


완벽하게 착한 딸 역할에만 머무를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다른 역할도 있기 때문이다.


자식에게는 한없이 퍼주어도 부족하기만 한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아빠의 빈자리를 채워주기 위해,

사랑이 고픈 아이에게 사랑을 주기 위해,

아이의 감정을 받아주고, 아이와 함께 온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워킹맘의 시간은 부족하여, 퇴근하고 온전히 온 마음을 써서 시간을 보내도, 늘 미안했다.

나에게는 완벽하게 다 줄 수 있는 엄마의 역할만 하고 살기에는 다른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그렇게 아홉 살을 거쳐 열 살이 되었다.

아이의 다양한 감정을 수용해 주고,

아이의 시간에 내 시간을 맞추다 문득,

나의 감정을, '나'를 살펴 줄 시간도 필요하다 생각했다.

그래서 육퇴 후의 시간이 필요했다.

열 살은 부모와의 시간도 필요하지만, 조금씩 친구들과의 시간을 늘려 나가는 시기인 듯하다.

부쩍 친구들을 찾을 때가 많아졌고, 아이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낼 때, 나도 동네 언니들과 시간을 보냈다.

아이가 학원에 가 있을 때, 책을 읽고, 이렇게 짬짬이 글을 썼다.

'나'를 살폈더니, 아이가 더 많이 보였고, 아이를 더 잘 살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중2 담임, 국어 교사이다.

질풍노도의 시기, 북한이 이 아이들 때문에 무서워 남침을 못한다는, 문제의 그중2의 담임.

무엇이든 예민할 수도 있는 시기,

무엇이든 삐딱할 수도 있는 시기,

무엇이든 스펀지처럼 빨아들일 수도 있는 시기.


학생들을 대할 때는 늘 조심스럽다.

나의 모습 그대로를 보여 줄 수도, 완전한 가식을 보여줄 수도 없는 직업이다.

교사란.

나는 이토록, 먼지 투성이인 삶을 살고 있는데, 내 직업이 교사라니.

가끔은 '이래도 되나.'싶다.

게다가 국어 교사라니.

수능 언어영역을 그제껏 본 모의고사보다 훨씬 못 봐 망쳐놓은 주제에.

전공이 국어라니.

학생들이 질문할 때 "그러게, 쌤도 헷갈리네. 같이 찾아보자." 하는 주제에, 국어 교사라니.

(그래도, 학생들을 예뻐하는, 함께 탐구하는 교사입니다. ^^ 공교육이.. 무너지지는.. 않았어요. ^^

진짜, 조심스럽다.)

늘 반성하지만 또 늘 합리화하기도 한다.

나는, 교사의 역할에만 머무를 수는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8시 반부터 4시 반까지 교사의 역할을 수행하지만,

중간중간 아이의 엄마 역할도, 엄마 아빠의 딸 역할도 수행한다.


완벽한 정*면체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은 없다.

어제는 왼쪽 상단 꼭짓점의 역할에 치중하기도 하고,

오늘은 오른쪽 하단 꼭짓점의 역할이 더 중요해지기도 한다.

내일은 그 어떤 꼭짓점의 역할도 수행하기 싫어져 정*면체의 중심에만 머무를지도 모른다.


그럼, 뭐 어떤가.

사람에게는 누구나 수행해야 할 다양한 역할이 존재하고,

그 모든 역할에 완벽할 수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저런 역할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니, 너무 골머리 앓지 말기를.


그냥,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 하면, 그것으로 된 것이니.

후회도, 미안해하지도 말기를.

Keep Going On :)


육각형 인간 따위, AI도 못해.

렉 걸릴걸?렉렉렉렉렉- 뚜두두둥!(윈도우 꺼지는 소리)


(+) 요즘 나의 새로운 역할은

철없는 엄마, 철없는 딸이다.

초3 사춘기가 시작되는 듯한 딸 앞에서

학교 가기 싫다고 게으름 피우고

초통령 아이브 노래를 크게 따라 부르며 되지도 않는 웨이브를 탄다.

항암치료로 인해 지친 아빠와, 병간호로 힘이 빠진 엄마 앞에서

실없는 농담이나 하며 헤헤거린다.

이게 나의 최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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