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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득 달 Oct 25. 2024

아빠가 하늘로 소풍을 떠났다.

여자 셋이 살게 되었습니다.

40년 전 아빠는 나의 출생 신고를 했고,

그로부터 40년 후 나는 아빠의 사망 신고를 했다.


파란 가을 하늘이 눈부시던 날 아침,

아빠가 하늘로 기나긴 소풍을 떠다.


우리 모두는 아빠의 임종을 지켰다.


모든 것이 처음이라 정신이 없었던 탓인지,

비현실적인 상황들이 실감이 나지 않았던 탓인지,

입관과 발인을 제외하고는

눈물이 나지 않다.


되려 조문객들이 나보다 더 많은 눈물을 흘리고 갔던,

이상한 장례식이었다.



2주 전.


아빠 아빠의 마지막을 직감한 듯

애들이 보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어제 그제 혈변을 보신 아빠는

마약성 진통제 성분이 있는 패치를 붙였다고 한다.

그리고 아빠는

"형님이 이렇게 요양원에 계시다 가셨겠지?"라고 했다고 한다.

"형님은 약도 못 써보고 돌아가셨는데, 당신은 해 볼 만큼 했어. 다 가는 거야. 자기야, 우리 마음 편히 생각하자."

엄마와 아빠의 이런 대화는.

듣는 내가 마음이 힘들다.


애들이 보고 싶다니.

집 근처 병원에 계셔서 매일같이 가서 보는데도, 아빠는 애들이 보고 싶다고 했다.


병원에 입원한 할아버지를 면회 가서 동글이는

"엄마, 세***는 다른 사람들 못 들어오게 하는데, 이 병원은 다른 사람도 막 들어갈 수 있네! 왜 그런 거야?" 했다.

"응~, 보고 싶은 사람들 다 만나라고 그러는 거야. 할아버지 보고 싶은 사람 다 만나라고."

"아~"

"할아버지는 누굴 보고 싶으실까?"

"아들이겠지 뭐~~"

라는 동글이의 대답에 엄마와 나는 박장대소를 했었다.

아빠가 보고 싶은 애들이란, 매일같이 보는 나도, 동글이도 있겠지만, 아들 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클 것이다.

그런데, 하나도 서운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직은 모르는 딸의 이혼이기에 아빠는 사위가 보고 싶었을 것이다.

아빠 마음 편하게 떠나실 수 있게 그간의 이야기를 해야만 했다.

내게는 아직 숙제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빠가 보고 싶다고 얘기한다면, 사위를 부를 생각이었다.

올지 안 올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아빠의 기나긴 소풍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생각했다.

2년 전 아빠의 갑작스러운 수술이 시작이었다.

그 큰 병원에서도 처음 하는 수술이라며, 가족 모두를 불러 모았던 그날,

엄마가 아빠 세수를 깨끗하게 시켜 수술실로 보냈다는 그날,

혹시나 수술 도중 잘못되어 우리를 부르면 어떻게 하나 하는,

드라마에서나 보던 장면이 내게도 연출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그리하여 내가 본 아빠의 마지막 모습이 수술실로 가는 베드에 덤덤하게 누워있는 모습이 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약 9시간에 걸친 기나긴 수술시간 동안 그런 걱정을 하며 기도했다.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기를.


그 준비가 시작이었다.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하시며 매 고비마다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그리고 아빠의 아픔에 함께 이리저리 휘둘리는 엄마를 보며,

어느 쪽이든 더 이상 아빠가 아프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래서 이번에 장례식장이며, 상조회사며, 영정사진이며, 납골당이며 하는 현실적인 준비를 하면서도 울지 않았다.


그런데,

아빠의 애들 보고 싶다는 말은,

겁 많은 아빠가 그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아팠고, 얼마나 큰 힘을 냈는지 알기에,

슬프다.

울고 싶다.


아빠, 나도 아빠 보고 싶어.

아빠 손을 잡고,

아빠의 기타 소리를 듣고,

아빠랑 얘기하고 싶어.


1주 전.


아빠는 일주일째 혈변을 보고 계신다.

혈변, 수혈, 혈변, 수혈의 반복이다.

물론 이 병원에 입원하면서 연명치료거부 동의서를 작성했고,

거기에는 수혈, 심폐소생술, 승압제 사용도 포함되었지만,

이것은 의사의 판단에 의한 것으로 완전한 임종기에 접어들기 전까지는 어느 정도까지는 사용하는 듯하였다.

(병원마다, 의사마다 다를 수 있을 것 같다.)


아침에 엄마와 통화를 했는데,

어제 새벽 5시 어마어마한 양의, 수혈을 한 만큼 양의 피를 다 보내놓고 아빠는 편히 주무시고 계신다 했다.


엄마는 새벽 5시에 아빠의 등까지 척척해진 혈변을 치우며,

"당신도 불쌍하고, 나도 불쌍하다.."

고 울었다고 한다.

바보(아빠)는 그걸 알아들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고,

그걸 듣는 나는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수혈을 받고 나면,

새벽에 아빠 배는 설사가 나올 것처럼 부글부글하고,

내내 끙끙 앓다가,

마침내는 수혈받은 만큼의 피를 내보내고는,

이내 평화를 찾고 잠에 든다고 한다.

엄마는 밤새 내내 잠을 못 자고,

해가 있으면 또 잠을 못 자니,

미치겠다 한다.

엄마는 엄마를 미친년이라 했다.

수혈을 받자니 배가 끓고, 또 쏟아내고,

안 받자니, 피가 모자라 곧 힘든 상황이 닥칠지도 몰라,

주말 내 고민이던 엄마였다.


오늘 아침 9시 회진을 돈 의사는

피가 샐 때 배가 부글부글 할 수 있다고,

헤모글로빈이 5까지 떨어져, 그래도 수혈을 해야 한다고 했다고 한다.


신경숙의 <감자 먹는 사람들>을 읽다 그만

병상에 누워계시는 아빠가 생각이 나,

아빠의 혈변 가득한 기저귀와 환자복을 정리하며,

혈변이 덕지덕지 뭍은 아빠의 몸을 닦으며 울고 있을 엄마가 생각이 나,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

학생들이 볼까 얼른 눈가를 눌렀다.


아빠가 안 계시는 때의 나를 생각해 슬픈 것이 아니라,

나는 아빠의 아픔이 슬프다.

엄마 혼자 고생하고,

나는 편히 먹고 자는 것 같아 미안하다.


어제 병원에 갔을 때 아빠는,

점심 때는 내내 감고 있던 눈을,

저녁 때는 부릅뜨고 나와 동글이를 응시했는데,

그 눈이 한껏 겁에 질려 있어서,

나는 그만 아빠가 불쌍해졌다.

나와 동글이를 눈에 담아두려 애쓰는

그 눈이, 가여웠다.


아빠 침대 머리맡에 놓여있는 아빠의 물건들(갤럭시 워치, 체온계, 블루투쓰 스피커, 부적)을 치울 수가 없다.

치워버리면 아빠가 영영 우리 집에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

언제라도 와서 아빠 침대에서 쉴 수 있게,

나는 아빠 자리를 오늘도 그대로 둔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가 않다.




3일 전.


의사는 주말이 고비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했지만,

아빠는 주말을 무사히 넘겼다.


이제 아빠는 약도 삼키지 못하게 되었다.

삼키지 못한 약을 이에 붙인 채 입을 벌려 숨을 쉰다.

혈소판 수치가 한자리로 떨어졌지만, 더 이상 수혈을 받지 않기로 했다.

혈소판 수혈을 받아도 수치는 계속해서 곤두박질쳤고, 그래서 이에 붙은 약을 떼어내다 잇몸에서 피가 날까 봐 건드리지 못했다.


아빠는 잠을 자며 이승과 저승 그 사이 어딘가를 헤매는지 눈썹을 꿈틀거리고 미간을 찡그리고 몸을 부들부들 떤다.

고개를 도리질 치다 꿈쩍 한쪽 눈을 힘겹게 떠 나와 눈 마주치고 "아빠, 나 여기 있어."라는 내 말안심이 되는지 이내 다시 눈을 감는다.

어제는 한참 눈을 뜨고 수다스럽게 재잘대는 내 얘기를 듣더니, 오늘은 잠만 잔다.

어제는 엄마랑 나랑 아빠 몸을 들어 좌로 우로 바람 들어가라고, 욕창 생기지 마라고 해주고,

등을 두드려 주며 "시원해?" 물으니 맑은 아빠 목소리로 "응" 하고 대답도 했는데.

오늘은 숨소리에 가래가 끓는다.

변함없는 것은 퉁퉁 부은 손으로 내 손을 꽉 잡는 것.

요즘 들어 아빠는 엄마와 나와 동글이 손을 꽉 움켜쥔다.

마치 남은 생을 놓치기 싫어 꽉 움켜쥐듯.

아빠의 손이 퉁퉁 부어 내 손보다 주름이 없어지고 탱글탱글해졌다.

2일 전.


어제는 나와 눈을 마주쳤는데,

엄마 말이 오늘은 눈에 초점이 없다 한다.

분명 눈을 떴는데 허공을 응시하고 엄마와 눈을 미주 치지 못한다 한다.


엄마 말대로 아빠는,

눈을 떴지만, 뜬 것이 아니었다.

아빠 눈 가까이에서 이쪽저쪽으로 내가 움직여도 한 곳만 응시하고 있었다.

언젠가 본 김보통의 <아만자> (이 만화책은 꼭 읽어보셨으면 합니다.)에서처럼 시력을 잃은 것인지,

보이는데 초점을 맞추기 힘든 것인지,

그것은 아빠만이 알 일이다.


주말이 고비가 될 것 같다 하여 주말 동안 아빠가 잠든 사이 했던 그 얘기를

아빠가 들을 수 있을 때 다시 해야만 했다.

내 마음 편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아니기에.

아빠 마음 편히 가시라고 하는 이야기이기에.

어쩌면 기회가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최근 들어 혼잣말로 연습해 온 고백이었다.

아빠 손을 잡고, 아빠 귀 가까이에 갔다.


"아빠, 어제도 얘기했는데, 아빠가 못 들은 것 같아서..

나 동글이 아빠랑 이혼했어.

아빠 때문에 아니야.

미안해하지 마.

아빠 오기 전부터 사이가 별로 안 좋았어.

나는 아빠가 우리 집에 와서 좋았어.

선물 같은 날들이었어.

동글이도 할아버지가 우리 집에 와서 행복했대.

할아버지랑 추억이 더 많아져서 행복하대.

엄마 걱정, 동글이 걱정은 하지 마.

내가 씩씩하잖아.

내가 씩씩하게 잘 지킬 테니까, 아빠 아무 걱정 하지 마."


아빠는 내 얘기를 듣는 동안 가끔 아주 작은 소리로 '허'에 가깝게 "어.."라고, 바람 빠지는 소리로 대답했다.

아빠의 미간이 찡그려졌고,

감은 눈에 눈물이 고여 휴지로 닦아드렸다.


이내 아빠는 엄마를 찾는 듯했고,

"엄마 찾지? 하여튼, 엄마 바라기라니까~~" 라며 너스레를 떨고는,

엄마를 불렀다.




1일 전.


요 며칠 아빠는 미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몸속 염증들이 문제였으나, 해열제, 항생제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할아버지에게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동글이는

초점을 잃은 할아버지의 눈이 무섭다 하면서도

매일같이 나와 함께 할아버지를 보러 갔다.


어제보다 더 많이 부은 손과 발, 그리고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배는 아빠가 얼마나 힘든지 말해주고 있었다.


아빠가 집에 계실 때는

동글이가 제 아빠 생각이 날까 봐

홍길동처럼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것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아빠라고 부를 수 있을 때,

아빠가 들을 수 있을 때,

많이 불러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빠, 우리 아빠, 아프지 마. 걱정하지 마.

나는 아빠가 우리 아빠라서 행복했어.

고마웠어. 또 만날 거잖아 아빠 우리."


내가 자꾸만 '아빠'라는 단어를 사용하니,

동글이도 제 아빠 생각이 났고, 제 아빠가 보고 싶었나 보다.

동글이는 할머니를 끌어안고 울었다.

할아버지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슬픔과 제 아빠를 향한 그리움이 뒤섞인 울음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제 아빠와 통화를 한 동글이는 이내 기분이 풀렸고,

걱정하지 말라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애써 덤덤한 척, 얘기했다.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고.


아빠는 5인실에서 격리실(호스피스처럼 가족들이 자유롭게 면회가 가능한 병실)로 이동했고,

남동생은 병원으로 갔고,

나는 동글이를 재우고 난 뒤 혹시나 모를 준비를 했고,

새벽에 올케와 아직 애기인 조카가 왔고,

새벽 사이 무슨 일이 생기면 전화를 달라고 했고,

나는 전화를 기다리는 것인지, 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인지,

그 어떤 것이든 놓치지 않으려고 핸드폰을 꽉 붙들고,

잠을 잔 것도, 안 잔 것도 아닌,

그런 밤이 지나갔다.




하루.


아침 7시.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아빠는 열이 38도까지 올랐고,

새벽 3시경부터 끙끙 앓는 소리를 냈고,

산소호흡기 용량을 최대치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산소포화도 80 밑으로 떨어진다고 했다.

흔히 말하는 체인스톡은 없는 듯했다.

그냥 집에 있기에는 불안했다.

동글이와 함께 아침도 거른 채 병원으로 갔다.


아빠의 상태를 알려주는 수치는 혈압, 맥박, 산소포화도 외에 그새 하나가 더 늘어있었다.

분당 호흡수.


동글이는 남동생과 편의점에서 빵과 우유를 사 먹었고,

엄마는 5인실에 있던 짐 정리를 했고,

그 사이 나는 홀로 아빠 곁을 지켰다.


"아빠, 나 왔어. 동글이 아빠는 못 와. 기다리지 마. 아빠 때문 아닌 거 이제 알지?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말고, 엄마 걱정하지 말고."


아빠 손을 잡았다.

아빠의 손은 여전히 따뜻했지만,

전처럼 내 손을 꽉 잡지는 못했다.


짐 정리를 끝낸 엄마와 빵으로 대충 끼니를 때운 남동생이 들어왔고,

동글이는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가,

혼자 두기 불안해 데리고 들어와 멀리 떨어진 탁자 위에서 유튜브를 보게 했다.


"할아버지, 나 왔어!"


모두 모였다.


그리고 아빠의 분당 호흡수가 널을 뛰었다.

22-10-30-7...APN..12..APN...

APN이 되며 삐삐 소리가 울려 놀라 간호사에게 달려가니,

호흡이 잘 잡히지 않는다는 뜻이랬다.

혈압도 맥박도 뚝뚝 떨어졌다.

손톱 색이 파랗게 변했다.

동공에 빛을 비추어도 동공 확장이 되지 않았다.

이름을 불러도 반응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 곁에서 묵주 기도를 했고,

남동생은 아빠 몸과 주렁주렁 연결되어 있는 기계를 확인했고,

나는 불안해하는 동글이를 안아 주었다.

동글이는 멀리서 외쳤다.


"할아버지! 사랑해!"


아빠의 숨이 잠깐 멎었다.


"아아.. 어떡해."

"아빠!!"


엄마는 울었고,

침묵을 지키던 남동생은 아빠를 불렀다.


아빠는 다시 한번 숨을 쉬었지만,

그뿐.

그대로 숨이 멎었다.


8시 49분.

의사는 사망선고를 했다.


내 앞에서 숨이 멎은 채 고요히 있는 아빠는,

너무나 비현실적이라,

믿기지 않았다.


엄마도, 동생도, 동글이도 우는데,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손, 발을 제외한 아빠의 몸은 아직 온기가 남아있었다.

이렇게 따뜻한데, 사망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심장은 멈춰도 청각은 남아있다고 했다.

청각이 가장 마지막으로 사라지는 감각이라고.

나는 아빠 귀에 대고 또박또박 말했다.

아프지 말라고.

걱정 말라고.

사랑한다고.

내 아빠여서 행복했다고.

또 만나자고.


상조회사에 연락했고,

각자의 근무처에 연락했고,

상조회사에서 아빠를 이송할 장의차를 보냈고,

아빠의 몸은 꽁꽁 묶인 채 장례식장 안치실로 이송되었다.

병원에서 퇴원절차를 마치고,

사망진단서를 발급받고,

짐을 챙겨 장례식장으로 갔다.

장례식장에 대한 안내를 받고,

장례 지도사를 만나 안내를 받고,

상조회사 매니저에게 안내를 받고,

조문객을 받았다.


친지, 친구, 직장 동료를 포함한 조문객들은 눈이 벌게져서 들어왔는데,

나는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아직 상주라기엔 젊은 나의,

뭐가 뭔지 모를,

비현실적인 하루가 지나갔다.



이틀.


12시에 입관이 시작되었다.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땐 고3,

외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땐 스물,

외할머니 돌아가셨을 땐 스물일곱,

할머니 돌아가셨을 땐 서른아홉.

그럼에도 입관을 본 건 처음이었다.


아빠는 마지막 모습 그대로였다.

당장이라도 일어나,

"아구구구구."하고 앓는 소리라도 낼듯했다.

그런데, 미동도 없이 누워만 있었다.

아빠의 얼굴이 차디찼다.

어제는 분명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었는데,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부패 방지를 위한 안치실의 냉동고에 있었으니, 당연한 것이었는데,

차디찬 감촉이 비현실적이면서도,

내 손에 느껴지는 현실적인 감촉이라서,

그때야 실감이 났다.

아빠가, 아빠가, 내 눈앞에 있는데, 없구나.

그제야 눈물이 흘렀다.


입관을 기준으로 이승과 저승의 길이 나뉜다고 한다.

입관 전 향을 피울 땐 시계 반대 방향이었는데,

입관 후 향을 피울 땐 시계 방향이었다.

입관 전 제를 지낼 땐 절을 한 번만 했는데,

입관 후 제를 지낼 땐 절을 두 번 했다.

입관 전에는 안 했던 머리핀을

입관 후에는 왼쪽에 꽂았다.


아빠는 정말, 소풍을 간 것이다.

아빠는 정말, 여기에 더 이상 없는 것이다.



사흘.


11시 발인이라 아침부터 바빴다.


아빠의 영정사진을 들었다.

영정사진 속 아빠는 멋진 정장을 입고 팔짱을 낀 채 미소 짓고 있었다.

아빠가 좋아하던 사진이었고,

언젠가 할머니 영정 사진 얘기를 하다가,

당신께서는 이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하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아빠의 영정사진을 들고 장례 리무진에 탔다.

아빠와 마지막 소풍을 떠나는 길,

하늘이 눈이 시리울 만치 파랗고 아름다웠다.

소풍 가기에 딱 좋은 날이라며,

엄마와 마주 보며 웃었다.


15번 화구로 아빠의 관이 들어갔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동글이를 제외한 모두는 알고 있었다.

동글이는 사촌 동생을 안고 있는 제 숙모와 행렬 맨 끝에서 어른들이 우는 모습을 보며 함께 울 것이고, 여기는 어디인지 어리둥절해하고 있을 테다.


1200도가 넘는 온도에서

아빠의 육신은 타들어가고 있을 것이었다.

얼음장처럼 차디찬 몸이 일순 뜨거운 불길에 휩싸이는 것.

그것이 우리 몸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어느 정도의 뜨거움인지 가늠할 수 없는 뜨거움 속에서,

죽지 않으면 절대 견딜 수 없는 뜨거움 속에서,

아빠는 한 줌 재가 되어 돌아왔다.


그럴 때 우리는 흔히 '한 줌 재'라고 표현하는데,

정말 아빠는 '한 줌' 정도의 재였다.

저것이 정녕 아빠란 말인가.

나머지는 다 어디로 간 것인가.

아빠는 '한 줌의 재'만 남기고 어디로 간 것인가.

뼈만 남은, 아니, 재만 남은 저것은 아빠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한 순간에 멎어버린 마지막 호흡의 순간만큼이나

허망한 순간이었다.


화구의 온도가 채 식지 않아 아직 뜨거운 유골함을 품에 안고

남동생은 울었다.


아빠를 (아빠의 유골함을-나는 이 유골함에 담긴 '한 줌의 재'가 아빠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납골당에 안치하며 유골함에 손을 얹고 마지막으로 인사를 드렸다.


아빠, 안녕.

아빠, 그곳에서는, 아프지 않기를.

할머니 할아버지 만나 어린아이처럼 품에 안겨 행복한 미소를 짓기를.

이곳 걱정은, 하지 말기를.

훨훨 날아다니기를.



아빠의 장례 후

사망신고 등의 여러 행정적 절차를 밟았다.

사망신고 사흘 후 아빠의 주민등록은 법적으로 폐쇄되어 있었다.

아빠의 기본 증명서를 떼면서 보았는데,

작년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출생과 사망날짜는 있지만,

오래전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출생과 사망날짜는 없었다.


아빠의 물건들을 정리하고

엄마와 교외로 바람을 쐬러 나갔다.

엄마와 나는 손을 잡고 걸으며 얘기했다.


아빠의 암투병, 2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 2년이 그토록 지겹고 아프고 힘들었는데,

막상 2년이 지나 이런 날이 오니,

그날들이 그립기도, 여전히 아프기도 하다고.

그리고 가장 큰 감정은 허망하다고.


그래도,

그 허망한 삶이라도,

우리는,

아빠가 슬프지 않게,

우리의 삶이 슬프지 않게,

행복하게 살아가자고.


Bravo Your Life, My D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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