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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문득 달
Nov 01. 2024
돌싱녀의 기억법
사랑은 향기를 남기고
사람이 누군가를, 무언가를, 어떤 일을 기억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나의 경우
인지적 기억력은 시각에,
감각적 기억력은 후각에 의존하는 편이다.
어릴 적부터 나는 개코였다.
엄마는 다른 감각도 예민했지만 특히 후각이 예민했던 내가 향수 관련 일을 하려나? 했다고 한다.
냄새 잘 맡는다고 조향사가 되는 건 아니었다.
나의 개코는 나의 딸에게도 유전이 되었다.
동글이도 누군가를, 무언가를 후각으로
기억한다.
동글이는 할아버지가 집에 온 이후 할아버지의 가슴에 케모포트를 심기 전까지
할아버지의 품에 파고들어 킁킁 거리며 할아버지 냄새를 맡았다.
할아버지에게선 구수한 땅콩 냄새가 난다고 했다.
아빠는 땅콩을 좋아했다.
땅콩을 하도 먹어 땅콩 냄새가 배었나?
나는 그 땅콩 냄새가 안 나는데, 동글이는 할아버지의 땅콩 냄새가 좋다고 코를 킁킁댔다.
할아버지
의 가슴에 케모포트를 심고 나서는 손을 킁킁 댔고,
땅콩을 드시지 않고, 약만 잔뜩 드셔서 그런지,
어느 날부터 할아버지의 땅콩 냄새가 없어졌다고 아쉬워하던 동글이었다.
동글이는 나의 친정집(광주집) 냄새를 좋아했다.
언젠가 엄마가 광주집에 내려가서 필요한 옷가지며 이불을 챙겨 오셨던 날,
동글이는 그 이불에 코를 박고 광주집 냄새가 나서 좋다며,
이불을 한참 끌어안고 있었다.
광주집에 안 간 지 너무 오래되었다며
.
이제는 사람이 살지 않아 곰팡이 냄새가 난다 했더니,
그럼 이제 광주집 냄새는 맡을 수 없는 거
냐
며,
서글프게 울기도 했다.
우리 집에서
더이상
제 아빠 냄새가 나지 않아 속상하다고도 했다.
원래는 아빠 방이었던 곳의 원래는 아빠 옷장이었던 곳에는
동글이가 쓴 "아빠, 사랑해"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그것이 떼어진 것을 알고,
아빠의 시큼한 땀냄새가 이 집에서 나지 않는 것을 깨닫고,
동글이는 우리의 현실을 받아들였다.
나에게도 전남편은 후각과 그날들의 공기로 기억되는 사람이다.
전남편을 처음 만난 날의 공기를 아직도 기억한다.
후텁지근한 여름날, 노을 지는 그곳의 더운 김이 끼치는 바람의 감촉.
전남편에게 처음 선물 받았던 불가리 쁘띠마망의 향은 그 나잇대만이 가질 수 있었던 풋풋하면서도 여림 그 자체였다.
1년 여의 연애 끝에 이별을 했고,
전남편의 환승 연애를 알게 되었고,
끈질기게 그리워하다 마침내 이별을 받아들이게 되었을 때는,
찬 바람이 코끝을 시리게 했던 늦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집 근처 지하철역에서 맞이했던 그 시린 공기는 아직도 마음 한
편
을 시리게 한다.
다시 만나 결혼을 했고,
바람이 난 전남편은 1번 상간녀에게 향수를 생일 선물로 받아 왔다.
버버리 터치 포 맨.
한동안 그 향을 맡으면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선물 받은 이후 줄기차게 뿌리고 다니던 그 향수는, 상간녀 소송과 취하라는 난리통을 겪는 와중에도 버려지지 않았다.
꼴도 보기 싫으니 내다 버리라는 나에게
물건은 물건일 뿐이라고, 자신에게는 물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라고 항변하는 전남편이 향수를 다시 찾아 뿌리던 날,
나는 극심한 두통과 울렁거림에 시달
려야만 했다
.
며칠 째 어지러움과 두통과 울렁거림을 호소하니,
전남편은 그 향수를 쓰는 것을 포기했다.
그 묵직한 버버리 터치 포 맨의 향을 떠올리면 어떤 기분이냐 하면,
찬 바람이 막 불기 시
작
하던 초겨울,
친정엄마가 사 준 속옷과,
친정엄마가 사 준 셔츠와,
친정엄마가 사 준 바지와,
친정엄마가 사 준 코트 위에,
그 더러운 향수를 뿌리고,
1번 상간녀와 서로의 살을 포갠 채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았을 것이 생각나,
배신감에 몸서리 처지고,
그 비 도덕적인 언행들이 진심으로 역겨워,
그들의 모든 살점들을 쥐어뜯어놓고 싶은 기분이 된다.
어떤 기분일지,
상상이나 될까?
나는 내가 좋아하는 버버리 위크앤드 포 맨을 전남편에게 선물했지만,
전남편은 내가 머리 아프다고 하는 버버리 터치 포 맨도,
내가 선물한 버버리 위크앤드 포 맨도 아닌,
달콤한 향이 나는 나의 향수 페라가모 인칸토를 뿌리고 다녔다.
그리고 1번 상간녀와 두 번째 외도를 이어갈 즈음,
나의 페라가모 인칸토와는 조금 다른 달콤한 향이 전남편에게서 났는데,
그 향의 정체는
코치 플로럴
이었다.
전남편의 차에서 발견된 코치 플로럴의 출처에 대해 묻자,
전남편은 본인이 너무 좋아 뿌리기 위해 샀다는 말로 나의 의심을 일축했다.
페라가모 인칸토를 뿌릴 때부터 의심을 해 봤어야 했다.
전남편이 왜 남자 향수가 아닌 여자 향수를 뿌리고 다니는지.
전남편이 왜 차에 블랙체리처럼 달콤한 향의 방향제를 두어야 하는지.
개인의 취향일지도 모르지만,
너무나 명백한 여자 향수인데 말이다.
그 코치 플로럴을 전남편이 샀다는 것을 1
도
믿지
않았던 나는,
코치 매장에서 잠깐 일
했
던 1번 상간녀에게 선물 받았을 것이라
멋대로
추측한 나는,
참 우습게도,
그 코치 플로럴이 부러웠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척,
코치 플로럴을 구입했지만,
전남편은 나의 코치 플로럴에는 관심도 없었다.
이상하게도,
코치 플로럴은 버버리 터치 포 맨처럼 나의 두통을 야기하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아마 전남편을 생각하는 나의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기 때문은 아니었는지 싶다.
그리고, 그 코치 플로럴은 아직도 나의 화장대에서,
나의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다.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는 1번 상간녀에게,
다 끝난 전남편과의 관계에서의 향인
버버리 터치 포 맨과, 코치 플로럴은 어떤 기억을 불러일으킬까.
이루어질 수 없었던 사랑에 가슴 아파할까.
내가 느끼는 것처럼 자신의 지난 '내로남불'이 역겨울까.
행복해야 할 결혼 생활 중 자신의 과오가 드러날 까 불안할까.
아니면,
내 예상과 너무 다르게,
그냥 아무렇지도 않을까.
그들에게는 그저 물건일 뿐인 향수가,
예민한 내게만 울렁거리는 것일까.
어쩌면
이제는 버버리 터치 포 맨도 나에게 극심한 두통을 안겨주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잠깐 역겨운 기분이 스쳐 지나갈 뿐일지도.
기억에 따른 감정은 그렇게 둔감해져 가는 것이니까.
사실 내가 좋아하는
버버리 위크앤드 포 맨은
전남편은 모르지만 내 첫사랑에게 처음 선물했던 향수였다.
레몬의 톡톡 튀는 탑 노트도, 시트러스 계열의 베르가못 미들 노트도, 잔잔한 우디향이 맴도는 베이스 노트도 뭐 하나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향이다.
전남편과
다시 만나기 전
잠깐 썸을 탔던 남자의 옷에서도 이 향이 났다.
그 남자에게 이 향을 좋아한다고 했더니 그 남자는
"전여친과 만나며 전여친 집에 내 후드를 벗어놓고 간 적이 있는데, 그때 전여친이 그 향 때문에 하루종일 내 생각이 나서 미칠 것 같다고 했었어."라고 말해,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를 당황스럽게 했던 그런 향이다.
그런 버버리 위크앤드 포 맨
을
전남편에게 두 번이나 선물했다.
이 정도면 소심한 복수쯤 되려나?
전남편과의 기억을 따라다니는 이런저런 향은
풋풋하고 좋았던 지난 세월을 그리움으로 곱씹어 보게도,
아팠던 기억을 끄집어내어 두통, 어지러움, 울렁거림을 덜컥 안겨다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부제가
'사랑은 향기를 남기고'인 이유는
그러니까 그것이 '배신'이 아닌 '사랑'인 이유는
그 모든 기억과 감정들의 깊은 곳에는
그래도
'사랑'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지금 그 '사랑'이 부재하여 그 어떤 향도 남아 있지 않는 상태와의 대조를 부각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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