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한 수 - ‘어깨 짚기’ 37수
산 넘고 물 건너 한강을 건너서 뗏목을 타고 가다 뒤집혀서 나룻배를 타고 가는데 나룻배가 뒤집혀서 그냥 막 헤엄치면서 서서서~~~ 천신만고 갖은 개고생 끝에 정승 집에 도착한 박율은 물에 빠진 생쥐 꼴에 초라한 행색으로 정승 집 경호 무사들에게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해 가며 사지가 들려서 나가는 수모 끝에 간신히 최석정을 만날 수 있었다.
최석정을 처음 마주한 박율은 매우 놀랐다. 어린 시절 보약을 잘못 먹었는지 자기보다 나이가 스물다섯 살이나 어린 양반이 겉늙어 보이는 엄청난 노안(老顔)에다가 백발이 성성한 촌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의 눈빛만큼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맑고 영롱했다. 더 충격적인 건 늙은 외모와 달리 최석정의 목소리는 청나라 수입산 신상 옥쟁반 위에 굴러가는 엽전처럼 맑고 산뜻했다.
박율에게 갈아입을 비단옷을 내어 주고 극진하게 음식까지 대접한 최석정은 "삼라만상을 산학(算學)과 0과 1의 괘로 터득한 선생 같은 분이라면. 가로세로 19줄씩, 361개 교차점에 펼쳐지는 바둑의 오묘함도 잘 아실 것.“이라는 말과 함께 '수담(手談 손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뜻으로 바둑의 별칭)'을 권한다.
예사롭지 않은 풍모답게 처음 만난 사람에게 바둑으로 대화를 시작하자는 최석정의 제안에 박율은 과연 뭐가 달라도 다른 경지의 사람이라고 느꼈다.
상수를 양보하여 박율에게 백돌을 두게 한 최석정의 행마는 인간의 그것이 아닌 듯 은일하고 초탈하며 무욕의 경지였다. 채 35수밖에 안 두었는데도 삼라만상의 지극한 이치가 담긴 느낌이었다. 최석정의 바둑은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한 인간의 경지가 아닌 행마라고 깨달은 박율은 36번째 수를 두면서 우변 실리 작전을 구사했다. 지금까지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던 최석정은 박율의 수를 내려다보며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최석정은 한참 장고 끝에 ‘어깨 짚기’ 전략의 37수로 응수했다. 박율은 그 한 수로 자신의 패배를 직감할 수 있었다. 듣도 보도 못한 경지였다. 앞에서 바둑을 두는 자는 사람이 아닌 그 어떤 아득한 초월적 존재 같다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