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
산학본원(算學本原)을 완성해 나갈 즈음 박율은 구수략(九數略)이라는 서책을 접하게 된다.
주역의 괘에 나타난 형상과 변화를 응용해 수리(數理)에 대해 이해하려는 상수학적(象數學的) 인식을 바탕으로 수리 철학을 저술한 구수략(九數略)이라는 서책을 발견한 박율은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구수략(九數略) 안에는 역경(易經)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가로, 세로, 대각선 어느 방향으로 더해도 합이 같은 특징을 가진 완벽한 방진(方陣)이 만들어져 있었고, 이러한 숫자들의 계산법을 연구하는 산학(算學)이 자연 만물의 이치에 벗어나지 않는다는 저자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의 설명이 덧붙어 있었다. 서책엔 서로 직교인 9×9 방진 쌍 및 (서로 직교가 아닌) 두 개의 10×10 방진이 수록된 서책에는 두 10×10 방진을 각각 백자자수음양착종도(白子子數陰陽錯綜圖)·백자모수음양착종도(白子母數陰陽錯綜圖)라고 명명하였으며, 9×9 직교 방진을 구구모수변궁양도(九九母數變宮陽圖)라고 적혀 있었다. (이는 세계적인 수학자인 오일러의 발견보다 60년 이상 앞선 것임.)
박율은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이 만든 마방진(魔方陣)과 지수귀문도(地數龜文圖)가 빚어내는 아름다움에 닭살이 돋고 감동의 물결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파도가 되어 덮치는 듯한 엄청난 압도감에 사로잡혀 닭똥 같은 눈물이 흘렀다.
박율은 외롭지 않았다.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 그라면 0과 1로만 세상 이치를 설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음양의 숫자가 조합되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박율 자신의 발상을 충분히 이해하고 숫자와 산학(算學)만으로도 세상 이치를 밝힐 수 있는 심오한 대화가 가능하리라는 확신을 얻었다.
그러나 박율의 아들뻘 되는 나이인 명곡(明谷) 최석정(崔錫鼎)은 자신이 만나기엔 워낙에 고귀한 신분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정승을 지낸 소론의 영수가 아닌가. 노론파에 속하는 자신과 대립하는 파벌의 최고 관리를 만난다는 부담감이 만만치 않았던 박율은 문득 140여 년 전 25살 이상 차이가 나는 나이에 리(理)와 기(氣)의 관계와 사단칠정 논쟁을 벌인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을 떠올렸다.
박율은 내키지 않았지만, 본진 한가운데 적장을 상대하러 가는 장수의 심정으로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과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0과 1의 괘로만 풀이한 서신을 작성하여 최석정에게 보냈다.
곧바로 도착한 회신에는 '만나서 바둑이나 한판 두자.'는 간단한 내용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