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몸과 공허한 정신
종강 2주차가 되었을 무렵,
난 스스로가 학기 중보다 훨씬 바쁘게 지내고 있음 깨달았다.
페이퍼를 제출할 일도 없고 듣는 수업도 없었지만
내 일상은 이상하리만큼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스터디, 개인 연구 준비, 지도교수님과의 면담,
그리고 끝없는 잡생각들까지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었다.
빽한 하루의 일정을 전부 소화하기 어려웠는데
특히나 헬스장에 다녀온 후에는
학기 중보다 몸이 훨씬 뻐근하고 쿡쿡 쑤셨다.
평소 나는 몸이 바쁘면 정신이 맑고 개운한데
요즘 내 정신은 공허했다.
매일 아침과 밤이 되면,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괴로워했다.
'내가 잘하고 있는 게 맞겠지?'
이런 불확실함은 점점 커져갔고
정신은 마치 황무지처럼 공허해져 버렸다.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면 정말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연구실, 스터디룸을 제외하고는 사람들과 접촉이 없긴 했다.
하지만 다 이유가 있었다.
SNS만 봐도 나보다 잘 지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직장인 선배, 친구들의 근황을 확인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기 때문이었다.
그저 막연한 부러움과 질투심이 뒤섞여 있는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길을 선택했기에
포기할 수 없다는 책임감과 압박감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꾸만 나를 흔들었다.
분명 더 잘되려고 들어온 대학원인데
요즘 들어 점점 의구심이 들고 있었다.
대학원생으로서의 '나'에게.
지도교수님과는 연구 이야기만 하기 때문에
요즘 내 깊은 고민에 대해서 털어놓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취업, 박사과정에 대해 슬쩍 말씀을 드려봐도
동기들과의 정보 교류가 중요하다고만 하셨다.
족보 사건 이후로 동기들에 대한 정이 전부 떨어져 나갔기에
교수님 말씀을 들어도 동기들과 정보교류의 가능성은 0%라 생각된다.
정말 그랬다. 대학원 동기들은 대학교 동기들과 차원이 달랐다.
서로가 서로의 경쟁자라는 인식이 더 강했던 걸까.
동기들끼리 모여도 '연구', '취업'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다들 황급히 화제를 돌려버리곤 했다.
금기어인 것처럼 절대 꺼내선 안될 말인가 싶었다.
지도교수님은 이 상황들을 모르시는 것 같기도 했다.
'동기들이 알려줄 리가 없잖아요...'
속으로만 생각했다.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결국 모든 것을 혼자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종강 직후부터 나 자신을 바쁘게 만들었다.
하지만 바쁠수록 정신은 점점 더 흐릿해지고 공허해졌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일까.
끝이 보이지 않는 나 자신과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바쁜 일상을 어떻게든 즐겨보려고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하고 싶은 것들, 배우고 싶은 것들이 많지만
로스쿨 준비로 이미 수년을 허비한 후 남은 건 불안함과
시간에 대한 강박뿐이었다.
결국 바쁜 몸과 공허한 정신은
조급함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석사 2학기가 시작되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하지?
졸업 시험은 통과할 수 있을까?
통과한다고 해도 그 이후엔 뭘 할 수 있을까?
나는 뭐라도 될 수 있을까?'
밤마다 이런 고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 고민들을 당장 떨쳐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대학원에 들어오기로 결심한 것도
끝까지 버티기로 다짐한 것도 결국 나 자신이었다.
힘들겠지만 조금이라도 여유를 가지고
이 조급함을 내려놓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불확실함 속을 헤매야 하는 것이 대학원생의 숙명이라면
이제는 이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하루에 한 번쯤은 숨을 돌릴 여유를 허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주는 특별히 눈에 띄는 일이 없었지만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불확실함을 받아들이고 조금이나마 여유를 갖는 것이
대학원생으로 살아남는 현실적인 생존 전략 중 하나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