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창과 방패
쉽게 끊길 인연이 아닌 듯했다. 이 신원미상의 여자와 어떻게 하면 인연이 한 번에 끊어질까, 답장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문수는 숨을 한차례 고르고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답장을 써 내려갔다.
[ 나 새거 생겨서 쓰던 건 이제 안 씀 ]
문자를 보냄과 동시에 답장을 읽은 여자는 자정이 되도록 초인종을 누르지도, 답장도 하지 않았다. 문수는 한숨 고르고 편하게 잠을 청했다.
다음 날, 문수는 보안팀에 연락해서 보안을 더 강화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보안팀은 꼭 유의하겠다고 하며 문수가 전화를 먼저 끊을 때까지 기다렸다.
문수는 처음부터 이 집이 마음에 들었다. 첫 방문 시 문수의 행색이 초라했어도 보안팀은 처음부터 깍듯했고, 신수가 훤해져도 똑같이 문수를 공손하게 모셨다. 문수의 말이라면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알겠다며 모든 걸 수용했다. 관리비 350만 원이면 이런 대접을 받는구나.
문득 문수는 궁금해졌다. 그럼 관리비가 더 비싼 곳은 문수에게 어떤 대접을 해줄까? 레드카펫이라도 깔아주려나? 상상한 문수는 혼자서 웃음이 터져버렸다. 웃음은 끊길 생각을 안 했고, 문수는 배를 잡고 거실을 굴렀다. "관리비가, 관리비가 비싸면, 레드카펫을, 푸하하하." 문수는 그렇게 한참을 이제 막 마라톤 결승전을 통과한 선수처럼 숨을 헐떡이며 웃었다. 문수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는데 어떤 의미의 눈물인지 본인 자신도 몰랐다.
두 번째 관리비 고지서가 왔다. 여지없는 350만 원. 그리고 체납액 385만 원. 지난달 미납금에 10%가 붙었나 보다. 남은 화분은 3개. 슬슬 다른 급매물을 찾아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문수에겐 이제 화분 하나를 금세 팔고 현찰 800,000원 정도 쥐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이 동네는 신기하게 화분에 집착이 심한 것 같았다. 화분도 부의 상징인 걸까? 문수는 이 부분을 아직은 이해를 못 하는 영역으로 남겼다.
800,000원을 현찰로 쥐고 외출을 했다. 오늘은 집에서 문수 자신을 위한 요리를 할 생각이다. 문수의 생일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에게 큰 선물을 해주기로 했다. 가장 비싼 쇠고기, 미역과 함께 이것저것 집어담고 마지막으로 가장 유명한 베이커리에서 작은 케이크를 샀다. 문수는 빵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기분은 내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온 문수는 와이셔츠 차림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음악을 틀었다. 재즈가 흘러나왔다. '두비두비두밥~.' 재즈 가사를 따라 하며 쇠고기를 손질하던 문수는 칼에 엄지손가락을 베었다. 피가 뚝뚝 흐르는 자신의 엄지손가락을 보며 급격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놈은 엄지손가락을 위로 치켜올렸다. 그러면 나는 맞아야 했다. 소리를 지르면 더 맞았다. 내가 왜 맞아야 하는지도 몰랐다. 하이에나처럼 달려들던 3명의 수하인들. 난 그들이 더 미웠다. 진심으로 때렸기 때문이다. 그놈은 언제나 점심시간 이후 운동시간이 끝나고 잠깐 비는 그 시간에 매일같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왜 하필 날 택했을까. 왜 하필 엄지손가락이었을까.
옥방에서의 그놈을 떠올리던 문수는 김성진이 떠올랐다. 김성진도 마찬가지였다. 왜 하필 엄지손가락이었을까. 그들에게 엄지손가락은 무슨 뜻인 걸까. 김성진도 은연중에 날 무시했다. 대답하기 싫어서 손가락 하나로 대답을 대신했다. 문수를 자신의 대답을 들을 가치가 없는 사람처럼 대했으니까. 죽어 마땅했다. 개새끼.
문수는 엄지손가락에 의약용 밴드를 붙이며 계속해서 읊조렸다. 잘 죽었다, 나쁜 새끼. 어디 가서 그러고 살면 안 돼. 그럼 넌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죽였을 거야. 개새끼야.
문수는 밴드를 다 붙이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재즈를 따라 불렀다. 맛있는 냄새와 재즈 소리가 온 집안에 퍼져나갔다. 문수의 생일은 비싸고 고급졌지만, 더러운 기억들이 달라붙어 마냥 행복하진 않았다. 문수는 조용히 케이크의 초를 껐고, 재즈 음악만이 문수의 곁에 맴돌았다.
세 번째 고지서가 날아오기 3주 전, 문수는 부동산을 돌아다니며 매매값은 상관없으니 72평보단 더 넓고, 금장식이 기본 옵션이며, 남자 혼자 살고 있는 빌라를 추천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곳은 찾기가 힘들었다. 그러다 마지막 부동산에서 매물을 찾았다. "있긴 있는데. 혼자 살진 않아요. 4인 가족이 살고 있어요. 근데 거기 두 따님들이 모두 유학 가서 방학에만 들어와요. 그래서 깨끗합니다. 보시겠어요?" 4인가족이란 말에 문수는 고민했다. 아무리 딸들이 유학 갔어도 두 명은 처리하기가 벅찬데.
"한번 그냥 구경이라도 해보시겠어요?"
부동산에서 문수에게 한번 더 질문했다. 문수는 무언가 생각난 듯 미소를 띠며 그러자고 했다. 빌라에 도착하자마자 본 보안팀은 지난번보다 허술해 보였다. 주차장도 작았다. 슈퍼카를 다 주차하기엔 너무 좁았다. 심지어 이곳은 주차가 1인당 3대뿐이라고 했다.
일단 집안을 구경하던 문수는 현관문을 들어오자마자 반기는 금붙이 장식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 여기서부터 문수는 마음에 들었다. 한강이 보이는 곳이었다. 서울은 아닌지라 어쩌고저쩌고 대교들이 보이진 않지만, 조용하게 물길이 흐르는 한강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곳으로 이사를 결심한 문수는 자연스럽게 혼자 있던 여자 집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일단은 잘 봤습니다. 그런데, 남편분이 외출하셨나 봐요. 골프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얘기 잘 통할 것 같았는데, 아쉽네요."
"출장 갔어요. 한 달 뒤에 와요. 그 한 달이 어찌나 빠른지 몰라요. 오호호호."
여자는 입을 가리고 웃으며 공인중개사 어깨를 살짝 때렸다. 그리고 그 여자 뒤에 문수가 팔았던 화분이 보였다. 화분이 대체 뭐길래 돈이 차고 넘치는 사람들이 중고거래 플랫폼까지 하며 구매를 하는 걸까. 여전히 의문인 영역이었다.
문수는 공인중개사의 명함을 받았고, 김성진의 집으로 돌아왔다. 남은 화분은 2개.
문수는 두 번째 무대에 서기 위해 남은 화분 2개도 팔아버렸다. 흙이 묻어 있음에도 이 돈을 주고 순식간에 거래가 된다는 것이 이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이상했다.
화분 2개의 값은 한 달 치 관리비였다.
문수는 두 번째 무대가 꽤 재미난 무대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