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새로운 장르
일주일 뒤, 문수는 새로운 연극을 시작하기 위해 새로 찾은 그 집으로 향했다. 부아앙- 슈퍼카가 내는 소리에도 보안팀은 "무슨 일로 오셨어요?" 라며 문수에게 질문했다. 김성진의 집은 그러지 않았는데. 순간 보안이 너무 허술해서 이 집은 아닌 건가. 생각했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들어가자. 란 결심이 섰다.
"404호 이사할 예정이라, 집 다시 한번 더 보러 왔어요."
문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차단기가 올라갔다. 구식 경비 시스템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하주차장에 택배트럭과 배달 오토바이가 보였다. 보안이 허술하단 의미겠지. 문수는 생각했다. 엘리베이터도 하나였다. 모두가 다 같이 쓰는 엘리베이터였다. 4층에서 내린 문수는 엘리베이터에서 가장 먼 404호로 발걸음을 옮겼다. 뚜벅뚜벅. 띵동.
"누구세요?" 인터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 문수는 여자 집주인이 있음을 확인했다. "저 며칠 전에 부동산에서 집 보고 갔는데,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문은 여지없이 쉽게 열렸다. 심지어 마중까지 나온 타깃. "어머, 그때 그 잘생긴 총각이네. 근데 어쩌지, 먼저 계약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문수는 일이 조금 꼬였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아, 아쉽네요. 그래도 한 번만 더 볼 수 있을까요? 집을 정말 잘 꾸미셔서 자꾸 생각났어요. 다른 4호들과는 구조가 똑같은 거죠?" 문수는 다짜고짜 집 안으로 들어가 집을 다시 살폈다.
순간 여자 집주인은 당황했지만 금세 표정을 밝게 바꾸며 "집이 예쁘죠? 이 집에서 20년을 살았어요. 리모델링만 다섯 번 했어요. 다른 4호들은 이렇게 안 생겼어. 이거 봐. 이건 가벽이야. 공간 나눔을 철저히 해서 죽는 공간 없이 모두 다 사용하는 공간으로 만들었어요. 알아봐 주니 너무 고맙네. 커피라도 한잔 할래요?" 여자 집주인은 오히려 칭찬받은 기분에 들떠있었다. 몇 분 안 되어 나온 커피.
"편하게, 편하게 앉아 있어요. 커피 입에 맞을까 모르겠네. 우리 딸이 저번 방학 때 사온 원두인데 내 입엔 맛있더라고."
문수는 소파에 앉았고, 그런 문수 앞에 꽃무늬 커피찻잔이 놓였다. 문수는 이런 대접이 이제 당연했다. 당연히 맨 처음부터 커피를 권했어야지.
여자 집주인은 소파 옆 원목 의자에 앉았다. 원목 의자가 꽤 비싸 보였다.
"원목에도 안목이 있으신가 봐요."
문수는 여자 집주인에게 물었고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켰다. 맛이 시큼하고 썼다.
"아, 이거. 우리 바깥양반이 가구회사 크게 운영하잖아. 그중에 최고 좋은 걸로 하나 얻어온 거야. 시중엔 없어요. 보는 눈도 있으셔라. 그냥 우리 선생님이랑 계약을 할까? 내가 꾸민 이 집 그대로 깨끗하게 써줄 것 같아. 난 여기 이사 가는 거 너무 아까워." 여자 집주인은 커피찻잔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의미의 한숨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이사 가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문수는 예의상 물어봐줬다. "왜 이사 가시는데요? 이렇게 예쁘게 꾸미시고는." 물어봐주길 바랐던 듯, 여자 집주인은 곧바로 답했다.
"우리 집에 '목(木)이 부족하다는 거야. 근데 여긴 한강 근처고, 물 근처잖아. 그래서 사업번창이 멈춘 거래. 서판교 쪽에 단독주택 지었어요. 아주 빽빽하게 나무들이 즐비해있어. 거기로 가는 거예요." 문수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어이가 없어서 커피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목(木)이요? 그 사주.. 그거?" 문수는 이 동네가 왜 이렇게 화분 거래가 많은지 이제야 이해했다. 정답을 알고 나니 이 동네 사람들이 정말 하찮게 보였다.
문수는 이쯤에서 일을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 저 골프채 굉장히 비싼 거 아니에요? 세계 1위가 쓴다는 브랜드." 둘의 시선은 거실 창문 앞에 서 있는 골프채 가방으로 넘어갔고, 신난 여자 집주인은 골프채 하나를 꺼내서 문수에게 직접 갖다 줬다.
"어머, 선생님. 우리 남편이랑 취향이 어쩜 이렇게 잘 맞아. 맞아요. 그 브랜드. 일반사람들한텐 좀 무거운데 우리 바깥양반은 이게 그렇게 스윙감이 좋다나 봐." 여자 집주인이 꺼내온 건 아이언이었다. 문수의 일이 너무 잘 풀려갔다. 어쩜 이렇게 순진할까, 우리 아줌마. 목(木) 많은 곳으로 데려다 드려야지.
"저 한번 휘둘러 봐도 되나요? 만져보고 싶던 거라서." 문수가 허락을 구하자 여자 집주인은 '어휴, 얼마든지'라는 의미의 손짓을 날렸다.
문수의 얼굴에 피가 튀겼다. 문수는 남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커피가 아직 따뜻했다.
그리고는 달력을 봤다. 한 달 뒤에 남편이 온다고 했으니 남편은 3주 뒤에 처리하면 된다.
문수는 오랜만에 3개월 만에 또다시 부엌 한 편에서 사체를 처리했다. 인근 폐공장 분쇄기, 음식물 쓰레기. 처리 방법은 똑같았다.
하얀 가벽에 핏자국이 묻었다. 문수는 그게 참 신경 쓰였다. 로드샵 화장품 가게에서 새하얀 색의 매니큐어를 하나 샀다. 이로써 김성진의 돈은 모두 다 썼다.
매니큐어로 이곳저곳 핏자국을 없앴다. 발랐던 곳을 또 바르고, 더 덧발라서 핏자국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문수는 여자 집주인의 핸드폰을 확인하고 말투, 연락하던 지인들 모두 파악했다. 이 여자는 모임도 많아 보였다. 시간 많은 백수들이 찾는 사람이란 얘기다. 김성진보다 난이도는 조금 올라갔지만, 이것도 모두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문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소파에 양팔을 벌려 눕다시피 앉았다.
이제, 두 번째 연극 무대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