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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J Dec 25. 2023

초조함에서 해방되기_뒤에서 누가 자꾸 쫓아와요

그게 누군데? 시간이요.

산다는 게 뭘까. 철들고나서부턴 이 생각을 머리에서 떨칠 수가 없었어요. 그러다가도 할 일은 계속 생겨 또 잠시 잊고 지내다가도 같은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지요. 대체 산다는 건 뭘까.


어렸을 적 기억은 잘 나지 않아요. 희미한 장면이나 감정 따위는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지만요. 그때는 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잘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다만 열 살 생일날은 비교적 기억에 잘 남아있어요. 사람은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게 된 날이었거든요. 난생처음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꼈던 날이 생일날이라는 게 좀 이상하지요? 벌레가 무섭고, 불 꺼진 깜깜함 밤이 무서운 것과는 다른 원초적인 공포가 생일을 맞은 열 살짜리 아이를 두려움에 빠져 엉엉 울게 만들었지요.


사춘기가 시작되면서부터 시간은 점점 더 빨리 가더군요. 학창 시절에는 이 시간만 견디면, 참아 넘기면 비로소 제대로 인생이 시작될 것이라 생각했었어요. 시험이 끝나면, 고등학생이 되면, 입시가 끝나면, 대학에 입학하면.


그런데요 시험, 입시, 입학, 졸업, 취직- 하나를 넘으면 또 하나 눈앞에는 항상 새로운 해야 할 일들이 있었어요. 어찌어찌 해치우고 나면 또 다른 것들이 내 앞을 버티고 있었지요. 취직을 하면 끝인가요? 모든 것은 때가 있다는데 이직은, 결혼은, 출산은, 육아는, 내 집 마련은, 노후 준비는요? 그리고 이것들 모두 남부럽지 않게 잘 해내야 한대요. 해 놓은 일들보다 해야 할 일들이 더 많은데, 솔직히 좀 지쳤어요.


이것이 인생인가? 몇십 년 동안 꾸역꾸역 했는데도 평생 숙제가 있는 느낌. 그리고 앞에 놓인 일들이 하나도 쉬운 일이 아닌 느낌. 이게 맞나. 이게 맞나.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젊다고 보기에도 애매하고 늙었다 보기에도 애매한 나이가 되어 버렸어요. 그 옛날 울 엄마가 날 낳았을 때 엄마 나이가 지금 나보다 훨씬 어렸는데.


나는 아직도 내가 너무 어리기만 한 것 같은데, 세상을 잘 모르겠는데, 이뤄야 할 건 너무 많고 선택에 대한 책임의 무게가 커지는 게 느껴졌어요. 잘 해내야 하는데, 마음이 자꾸 조급해지기만 했어요. 조급함은 초조함이 되고, 불안함, 우울함, 무기력함, 질투, 분노, 두려움. 온갖 감정들이 매일 저를 찾아와 이렇게 물었어요. 넌 대체 이때까지 뭐 했니? 남들 따라가려면 너 지금 OO 해야 해!


주변을 둘러보니 내 나이에 이미 집을 장만한 친구도 있고, 성공적인 투자를 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결혼은 물론 출산과 더불어 육아의 길을 가고 있는 친구도 있었어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초조함이 먹구름처럼 머릿속을 가득 채워서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던 시절이었어요.

마음이 너무 급해서 당장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리석게도 제가 어떻게 한 줄 아세요? 홧김에 모든 것을 해 버렸어요. 무리한 투자, 무리한 만남, 무리한 자기 학대, 채찍질.


그래서 결과는 어땠게요? 다 망했어요. 모든 것이 와장창 부서져 버렸지요. 돈도 잃고 사람도 잃고 목적도 잃고 의지도 잃고 멘탈이 탈탈 털려버렸어요.


왜 그랬을까. 시간은 항상 제 속도대로 흐르고 있는데, 왜 자꾸 시간에 붙잡힐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까요?


연말에 텔레비전을 봤어요. 이 서른이 된다는 배우가 등장해 하루종일 이것저것 많은 일들을 하다가 "나의 서른이 기대된다, 새로운 일들을 많이 해봐야지"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고든 생각.

저 사람은 서른 저런 생각을 하는구나. 나는 서른에 저런 생각'만' 할 수는 없었는데.

억울했어요. 마냥 기대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나는 서른에 저생각만 '할 수 없었던'게 아니라 나는 서른에 저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네요. 왜 뭐에 씐 것처럼, 뒤에서 미친 × 이 따라오는 것처럼 살았을까. 알고 보면 그 미친 × 이 내가 아니었을까.


이제와 보니 남들이 오랜 시간 이뤄 놓은 것을 하루아침에 하려고 했었기 때문에 더 초조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마음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랬더니 비로소 시간의 흐름이 느껴져요. 질주하듯 내달리는 것이 아닌 나와 함께 잔잔히 흐르고 있는 내 인생이요.


산다는 게 뭘까- 저는 아직 해답을 찾지 못했어요.  

뭔가를 이루려고 하는 마음 내려놓 건 아니에요. 다만 빠르게 뭔가를 이루려고 하기보다는 느려도 언젠가 성취하려, 나만의 속도대로 한 발 한 발 나아가려고 해요. 이제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초조하지만은 않아요.


이 넓은 우주 속 나를 위해 주어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인생. 남들 속도에 맞추지 못하더라도, 남들보다 모자라더라도 나만의 답이 있겠지요. 몇 살에 무엇은 꼭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이제는 내려놓아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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