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닮은 아이를 상상해 본 적이 있다. 얼마나 유약하며 예민하고 또 소심할까. 생각만 해도 싫었다. 결혼을 할지 안 할지는 모르지만 아이를 낳게 된다면 좋은 성품의 남자를 만나 그를 닮은 아이를 낳으리라, 생각했었다. 날 낳기 전의 숙이 씨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나는 숙이 씨를 빼다 박았다. 일단 얼굴이 정말 닮았다. 학창 시절 나는 몰랐던 엄마의 교무실 방문을 친구들이 알려준 적도 있다.
"야! 너네 엄마 교무실 오셨더라!"
숙이 씨의 고향 동네에 가면 동네 할머니들은 모두 말씀드리지 않아도 내가 '숙이 딸'인 줄 안다. 엄마가 웃을 때 생기는 아코디언 주름도, 화살표 모양의 코도, 체형과 키마저도 나는 숙이 씨를 꼭 빼닮았다.
그럼 겉모습만 닮았느냐, 그건 아니다. 숙이 씨와 나는 내면도 닮은 점이 많다. 걱정이 많고 남에게 마음을 쉽게 주며 이상한 구석에서 지나치게 도덕적이고, 눈물이 많은. 이것들은 모두 내가 싫어하는 나의 특징들이다.
그럼 숙이 씨는 나를 자랑스레 생각할까? 딱히 그렇지도 않다. 누가 봐도 숙이 씨 딸인 나는 숙이 씨와는 또 생판 다른 점들이 있다. 건강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한번 꽂히면 지나치게 따져대고(떽떽거린다), 생각을 너무 깊게 하며 다소 부정적이고 게으르며 야망이 없는 모습이 숙이 씨와는 또 정반대다.
그리고 엄마의 끈기와 집념. 나는 그것을 닮지 못했다. 무슨 애가 욕심도 없고 야망도 없냐며 숙이 씨는 말하곤 했다. 나의 게으른 '열심'은 숙이 씨의 성에 차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 둘을 키우며 뒤늦게 대학에 들어가 전 과목 A학점에 매 학기 장학금을 받았던 엄마는 당연히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엄마를 닮지 못해 숙이 씨가 저렇게 못마땅하구나,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또 그것도 아니다. 퍽 하면 눈물을 쏟는 내 모습을 숙이 씨는너무나도 싫어하는데 그건 꼭 숙이 씨를 닮은 점이다. 아마 당신을 닮은 나를 보며 더 부아가 치밀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내 딸이 별것도 아닌 일에 눈물을 쏟는다면 화가 날 것 같긴 하다. 그 눈물이 아깝고 속상해서.
자식이 없는 나로서는 부모의 마음을 경험할 길이 없다. 그저 부모는 왜 나를 낳았는가, 왜 나는 이런 성격인가(혹은 이 모양인가). 이런 것들이 지난몇십 년간의 나의 고민거리였다. 부끄러워하고, 부정하고, 도피하고, 견디고, 좌절하고, 고민하고, 이겨낸 삼십 년의 세월이 지나고서야 나는 이제야 나를 조금씩은 받아들이게 되었다.
타고난 성향을 부끄러워하고 부정하는 일은 나의 토대 전부를 흔들고 무너지게 하는 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 때는 너무나 싫었던 숙이 씨와의 닮은 점이 언젠가는나와 그녀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나는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엄마에게서 딸에게로, 또 그 딸에게로 전해지는 그 연결고리가 수많은 상처와 고통과 방황 속에서도 아름답게 지속되길. 걱정이 많고 남에게 마음을 쉽게 주며 이상한 구석에서 지나치게 도덕적이고, 눈물이 많은 내가 언젠가는 한 아이를 걱정하고, 마음을 모두 주며, 도덕과 윤리를 강조하고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겠지. 꼭 숙이 씨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