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가 울렸을 때 퇴근하는 차 안이었다.
운전 중이라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를 보낼까 하다
익숙한 A어머니라는 발신메시지에 거치대에 핸드폰을 놓고 통화는 시작됐다.
"선생님, A엄만데요 통화 가능하세요?"
"네 말씀하세요"
".... 수행평가에 대해 말씀드릴 게 있어요"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영어 수행평가 말하기 점수에서 2점이 감점됐네요"
"아.. 네.. A한테 감점 이유도 말했고 수행평가 성적일람표도 나눠 줬는데요"
" 그 이유를 다시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어머님, A한테 다 설명했고, 말하기 평가 같은 경우 원어민선생님도 같이 평가하십니다.
촬영한 영상도 몇 번씩 보고요, 지필평가처럼 정답이 있는 게 아니라서요"
"네 그래서 더! 교사의 주관적인 생각이 들어갈 수 있지 않나요?"
정답, 주관적이라는 말이 거슬린다.
박선생은 뒤늦게 통화 녹음 버튼을 눌렀다.
"어머님 무슨 말씀인지 알겠고 이러실 게 아니라 내일 학교로 방문해서 이야기 나누시죠"
"지금 A가 밥도 안 먹고 울고 있어요. 선생님. A가 외고 가야 하는 거 아시죠?"
학기 초 상담에서 A가 반배치고사 전교 1등으로 중학교 선서를 하고 들어왔다고 잘 보살펴 달라고 말하던 상냥한 목소리는 온 데 간데없다.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수행평가 말하기 감점돼도 중간고사도 잘 봤고 또 남은 기말고사도.."
"선생님! 중간고사 95점이 잘 본거예요? 네?"
창밖 구름 낀 하늘이 눈앞으로 덮쳐 온다.
"어머님 제가 지금 운전 중이라 집에 도착하면 다시 전화드리겠.."
"선생님 지금 아이가 울고 있다구요. A 잘못되면 책임지실 거예요?"
등에 식은땀이 번져나가면서 몸이 떨리기 시작한다. 시간을 벌어야 한다.
"어머님 A 진정시켜 주세요. 제가 내일 학교에서 교과선생님들과 같이 의논해.."
"그러실 필요 없어요. 내일 교장실로 찾아간다고 전해 주세요"
뚝! 전화기 버튼 꺼지는 소리가 이렇게 클 수 도 있다고 생각하다가 뒤에 경적소리에 더 놀라 핸들을 다시 잡는다.
'침착해야 해' '침착해야 해'
핸들을 쥔 손에 땀이 베이고 등이 자꾸 움츠려 든다.
얼마 전에 용량 때문에 핸드폰 영상을 정리했는데 수행영상은 남아 있겠지.
설마 지웠더라도 드라이브에 자동 연동 됐으니 안심하자.
평가계획과 수행세부채점표를 내일 일찍 출근해서 검토하고
그래 교장한테 연락은 집에 가서 해야겠다.
아니, 미리 연락하면 교장이란 사람은 어떻게 자기가 빠져나갈지 시나리오부터 쓸 테니
내일 관련 자료를 검토한 뒤에 알리고,
머리가 전자레인지에서 막 꺼낸 팝콘 봉지처럼 부풀어 터질 것 같다.
5년 동안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영어라는 교과목상 소위 주요 과목이자 특목고 입시에 영향이 있다는 점 때문에 간혹 시험문제에 대한 이의제기가 있으면 같은 교과 선생님들과 협의해서 무난하게 해결했다. 대입과 직결되는 고등학교보다는 그래도 문제나 점수에 대해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박선생이 첫 발령을 받은 지금 학교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보통 학군이었다. 부모나 아이 또한 학업에 유난스럽지 않고 특목고도 가뭄에 콩 나듯이 가는 학교라서 특히 공부에 관해서 민원이 많은 학교와는 거리가 먼 게 사실이었다.
처음 부임교사 소개 순서에 교장이 박선생 이름 앞에 임용고사 수석이라는 말을 두 번 반복했을 때 학생들 사이에 환성이 터져 나왔다. 박선생은 지금까지 책으로만 구상했던 교육법과 수업방법을 교실에서 펼칠 생각에 들떠 있는 신규교사였고 교장의 속물스러운 소개가 은근히 만족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교사의 역할 중에서 수업은 대부분을 차지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수업준비에 시간을 들이면 업무(그것도 해마다 바뀌는 가지각색의 업무)에서 구멍이 나고, 업무를 처리하느라 쩔쩔매면 교과서조차 펼쳐 보지 못하고 교실로 향하는 일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정글 같은 교실에서 수많은 고자질과 다툼을 중재하다 보면 마치 교사가 아니라 수사관이나 변호사가 된 듯한 느낌으로 혼란스러웠다.
일단 집에 도착해 욕조에 물을 받아 목욕을 하고, 따뜻한 차를 끓여 마시고 음악을 들으면서 잠시 이 일을 잊을 것이다. 아니, 잊어야 한다.
이런 항의를 처음 받아 본 것도 아니고, 해가 갈수록 학부모들의 말은 거칠어지지만 박선생도 점점 떨려도 안 떨리는 척, 눙치는 솜씨가 쌓여갔다.
이번 일도 해프닝으로 끝날 것이라고 억지로라도 생각한다.
교장실에 찾아가겠다는 말은 요즘 들어 교무실 여기저기서 동료교사들도 듣는 말이다.
처음 그런 말을 들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하자.
쿵!
아파트 하얀 주차선에 하염없이 후진하다 벽에 부딪히는 바람에 소스라치게 정신이 번쩍 든다.
브레이크를 밟는 방법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